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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진리교회

2015년 하나님 말씀을 책으로 전합니다. 본문

2015년 하나님 말씀을 책으로 전합니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2. 29. 10:25


하나님12,31.hwp


 

 

 

  

기독교야 죽어다오! 교회여 살아나라, 제발!

 

 

 

 

머 리 말

 

 

기독교여. 온갖 내숭을 떨면서 살금살금 세상을 닮아가더니만, 어느덧 세상 뺨치는 그대가 되었구려. 이봐요! 그토록 부러웠소, 세상의 화려함이? 그리도 맛있었소, 세상의 달콤함이? 그대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소중한 교회였건만, 어쩌다가 그런 꼴이 되었더란 말입니까. 혹여 벌써 정신 줄을 놔버린 것은 아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됨의 영광을 스스로 포기한 채로, 누추한 종교로 추락하고 말았거니와, 세상장단에 맞추어 광대춤을 추고 있는 기똥찬 그대이니 말입니다. 희망사항은 언제나 세속의 헛된 것들일 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자유에 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그대이오니, 하여 교회는 무슨!!

오로지 숫자의 많고 적음이랄지, 외형의 작고 큼이라든가, 그대의 기도는 늘 그것들 안에서만 맴돌고 있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신부다움은 고사하고, 그분의 자녀 됨에서마저도 한참이나 동떨어진 그대가 아니겠습니까.

! 결국에는 한국기독교의 장자교단입네 하는 모모 교단총회에서 서부활극이 벌어지고 말았더라. 목사 한 사람이 갑자기 권총을 뽑아들더니만, “내 손에 권총이 있소이다.”라고 했었던 미증유의 그 개그 말입니다. 사실이 그러하건만 그대는 또 세계복음화? 또 민족복음화? 시방 장난하십니까?

가련한지고. 그대는 교회가 아닌 것이! 너절한 종교인 것이! 보다보다 못하여 침 뱉음일랑은 기꺼이 감내하며 간청하오니, 종교 나부랭이의 광대놀음에 정신이 없는 기독교여! 제발 돌아오시게나, 그대의 신랑 예수에게로! 제발 회복하시게나, 교회다움의 영광을!

 

목사님. 이리라도 면대하기가 어쩌면 마지막일 것 같군요. 뇌종양이니 뭐니, 공갈만은 아닌듯 싶었고요, 무엇보다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던 내 속의 그 거치른 아우성들 말입니다. “말하라! 토하라!” 시도 때도 없이 외쳐대는 그 처절한 함성들을 도저히 외면할 길이 없어 글 한 줄 올리게 되었나이다.

그럼요. 그럼요. 결코 쉬운 노릇은 아니었고 말구요. 저의 글과 형님의 상식이 어지간히 충돌할 터인데, 이래도 될까 싶어 몹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나이다. 하오나 사악하기 짝이 없는 요즘의 세월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저 같은 촌놈이라도, 종주먹 틀어쥐고 아니 몸부림 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형님. 간절히 바라기는, 큰 거부감을 야기할 뿐인 제 글 따위를 부디 용납해 주셔서, “무식한 촌것이라 그렇겠거니.”하시면서 첫 장만이 아니오라, 이 글의 끄트머리에서까지 저와 직면해주실 수는 도저히 없겠는지요. 보고픈 형님, 제발! 남양리 마을에서 아우 올림.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

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1:10)

기독교여. 정통교리? 그게 대체 뭐길래! 무언 그리도 대단하길래! 그렇지 않습니까? 피조물인 그대의 뇌로써 만들어 놓았으며, 마치 우상처럼 성경의 진리보다 더 높이 그대의 왕좌에 떡하니 앉혀놓은 정통교리라는 그 물건 말입니다.

심히 답답할찐저, 예수 이름의 참 자유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 정통교리의 품안에서만 느긋하니 종교질만을 즐기고 있는 그대여. 생각을 좀 해보세요. 대체 어디에 갔다는 것입니까? ? ? 없어지고 말았을까요? 정통교리로는 입도 뻥끗 못하고 있사오나, 종족이 묘연해지고만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구약성경 내내 함부로 일컫지도 못할 만큼 지극히 높임을 받고 있었던 여호와가 아니었습니까. 구약성경책 하나 가득 빼곡히, 오직 여호와! 오로지 여호와! 구약성경에 의해 여호와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 여호와는 홀로 높이 추앙을 받고 있었음이올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 예수승천 후에 기록케 하셨던 신약성경에 의해서는 단 한 번도 초청을 못 받는 가운데 완전히 지워졌고, 감쪽같이 사라졌고, 영원히 없어져버린, 비운의 그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물론 그대의 기막힌 변설을 이 촌놈인들 왜 모르겠는지요. 가령, 여호와는 히브리어 음가이므로 헬라어 식으로 주 혹은 주님!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둥, 그대의 폼 나는 논리가 아닙니까. 하오나 여호와 외의 모든 명칭들은 변화도 없고 번역도 없이 모세는 그냥 모세로, 다윗은 역시 다윗으로, 엘리야는 엘리야 그대로, 구약성서의 여타의 이름들은 신약성경에서도 고대로 존치되고 있사오니, 그대의 멋쟁이 논리는 별로 설득력도 없는 부질없는 허언이 아니겠는지요.

보십시오. 그토록 굉장했건만 말짱 제거되었음! 실로 어마어마했건만 신약성경에 의해 영원히 폐기되고 말았음! 그리되고 말았었던 그 여호와의 그 큰 아픔에 관해, 만일 그대가 말만이 아니오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진데 반드시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는지요.

 

기독교여. 그러나 작금의 그대 말입니다. 실로 아리땁던 그대였었지만 이제는 그대를 교회라고 부를 수조차 없구려. 그렇지 않습니까. 그대의 문전에서 밥 한 술 얻어먹고자 각설이 타령을 읊어본 지도 어언 40여 년! 그 긴긴 세월 내내, 대체 어찌들 살았기로 존경은 고사하고 욕이나 먹고 있는 것입니까.

더더욱 비참할찐저, 그대의 검은 속셈을 모두가 알고 있거늘, 그대만은 자기가 아직도 꽤나 그럴싸한 줄로 자화자찬에 빠져들고 있사오니 착각도 유분수가 아닙니까. 이보시오! 귀머거리요? 그래서 못 듣소, 그대 향한 혹독한 비난을! 눈마저 멀었소? 그래서 못 보시오, 그대 향한 사나운 눈초리들을!

털 난 양심만 아니라면 그럴 수는 도저히 없었건만, 금쪽같은 시간들을 헛되이 날리지를 않았습니까? 그대만의 그 고귀한 자유를 속절없이 뭉개지를 않았는지요. , 그대 그리 안 봤거늘 그 무슨 흉물스러운 꼬락서니란 말입니까. 돌 가슴인 그대는 이 촌놈의 심정 따위야 당연히 안중에도 없겠지만, 각골지통인들 이보다는 덜하리라. 면도칼 그 놈으로 내 살점을 확 도려낸들 이렇지는 않으리라.

! 차라리 주님의 피눈물인 성경, 성경 말입니다. 물론 희대의 영웅인 그대는 매우 담대하게도 예수의 그 피눈물에 대해 귀 막고 눈 감고! 멋대로 맘대로! 과연 영웅답습니다마는, 감람산 언덕배기에서도 겟세마네에서도 다만 눈물뿐! 오직 피눈물뿐! 그토록 서럽게 통곡하시던 진짜 성경 곧 그대의 주님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무쌍한 그대는, 천지분간도 못하는 그대는, 말끝마다 하하호호? 걸핏하면 희희낙락? 고객확보를 위한 그대 특유의 그 음습한 노하우 말입니다.

게다가 왜들 그렇게 숫자에 민감한 것입니까. 교인과 헌금의 푸짐한 숫자가 하나님께 영광이라도 된답디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주님부터 애당초 조폭들처럼 수북이 거느리고 다녔겠지만, 아니셨지 않습니까?

보세요. 세상의 빛과 소금인 그대에게 빛 충만 쏘였고, 소금 듬뿍 받아먹은 조국의 가엽은 양떼들 말입니다. 그대는 힘쓰고 애써서 빛 뿌리고 소금 절이느라고 별 짓을 다했겠지만 그대의 열매인 이 땅의 인간들, 어떻소? 곱소? 아니요?

코를 찌르는 이 악취들 말입니다. 그대로부터 빛과 소금을 질리도록 실컷 얻어먹은 그 결과였음을 누군들 부인하리요. 부패한 시대정신의 원조이며 썩은 영혼들의 젖어미인 그대 말입니다. 암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녘도 맑은 법! 육적인 원인 분석이야 속인들의 몫이지만, 신령의 면에서는 그대 기독교 외에 누가 또 윗물인 것입니까. 가령, “바알이여 복 내리소서. 바알이여 문제해결해 주소서?” “예수여 복 내리소서. 예수여 문제해결해 주소서?” 둘 사이에 차이점이 과연 있다고 보십니까?

바알에서 예수로 신의 호칭만 바뀌었을 뿐, 그대와 멸망당한 유다, 둘의 속내는 무조건 성공 좌우지간 돈! 아닙니까? 말로만 예수, 속셈은 번영의 신 바알! 아닙니까? ! 종교요 바알의 사람인 그대에게 빛 왕창 쏘였고, 그대 왕소금에 옴팍 쩔어버린 이 땅의 사람들하며 특별히 젊은이들 말입니다. 어찌 안 미치고 배기겠는지요.

아시다시피, 어느 목사의 빛과 소금으로 충만했었던 기막힌 모범사례 말입니다. 헌금인 공금을 30억씩이나 꿀꺼덕! 카지노 판에 홀라당! 썩은 물, 똥물! 마냥 퍼질러댔기에 아래 녘의 보통 인생들이야 푹푹 잘도 썩어왔으며, 드디어 미쳐서 날뛰고들 있지 않습니까. 조국의 인생들 모조리 그대를 쏙 빼닮아서 돈이라면 환장들하고 있고요. 아닙니까?

 

목사님. 이제 벌써 40년 전의 일이 되었군요. 그해 어느 가을밤. 밤이라기보다는 꼭두새벽 3시 쯤, 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벌떡 깨어났지 뭡니까. 꿈에 본 그 천국 말입니다. 드넓은 푸른 초장하며, 그 앞을 흐르던 강물은 시원스레 맑기도 하였어라. 제 모습은 색동옷에다가 영락없는 아이 모습이었고요. 그런데요 이거야, ! “! 좋다!”하면서 이제 막 잔디밭에 뒹굴려던 그 찰나!

원 세상에, 세상에! 천국 전체가 뇌성벽력이 되었지 뭡니까. “너는 아직 천당에 들어올 때가 안됐으니 세상에 나아가 전도하다 들어오너라!” 그 어마어마했었던 불호령과 동시에 저의 모습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색동옷에서 새하얀 어른 복색으로. 색실로 꼬아 만든 띠가 제 허리에 둘러져 있었고요.

그러나, 그러나, “아이고 맙소사! 어찌 가라고! 어찌 살라고!” 전도하며 살라하시던 꿈에 본 이 세상은요, 풀 한 포기 없었고 물 한 방울 없었고요, 끝 가는 데까지 사막! 끝도 없이 비참! 너무나도 썰렁했었고 너무너무 참혹했었지 뭡니까.

형님. 그러기에 기겁을 하며 후다닥 깨어날 수밖에요. 주님이 보여주셨던 이 세상 말입니다. 광야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무에 그 따위가 다 있었는지요. 얼마나 처참하던지! 얼마나 참혹하던지! 아무튼 우리 부부는 그렇게 성령님의 부르심을 받았지 뭡니까. !

 

기독교여. 그대가 교회가 맞기는 맞습니까? 그 좋던 교회다움일랑은 어디에다 팔아먹은 채로 그 너절한 종교기독교가 되었더란 말입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했거늘 빛은 무슨!! 이지러지다 못해 아예 가물가물하건만, 무언 용기가 그리도 많습니까. 그대 스스로 침을 탁 뱉어서 그마저 꺼버리려고 안달이 아닙니까. 세상을 밝히기는커녕 세상이 오히려 그대를 향해 빈정거리다 못해 탄식하고 있고요.

그렇고 말구요. , 엄청 비겁한 이 촌놈인지라 자살은 못하겠고 청컨대, 그 따위의 그대를 또 봐야하느니 제발 나를 콱 죽여줄 수는 없겠소. 기왕에 십자군이니 뭐니, 그대의 잔혹한 창칼에 의해 처참히 죽어갔었던 수수 많은 시체들하며, 정통교리수호니 뭐니, 그로 인해 나뒹군 정신의 시체들은 또 얼마인 것입니까. 어차피 사람백정인 그대! 나 하나쯤 더 죽인다한들 그대에게는 하찮은 짓이 아니겠는지요.

아무려나 묻사오니, 대체 왜들 그러는 건데? 예정론이라며? 그러니 갈 사람은 어차피 가고야말 터, 비참해진 것은 오직 그대뿐이건만, 체면도 없소? 부끄럽지도 않소? 그 버러지 같은 신천지와 뒤엉켜 싸우고 있는 그대의 초라함 말이외다. 교인 숫자, 그거 줄까 보아 안달하듯 비춰지고 있음을 왜 그대만은 모른단 말입니까.

알다시피, 사랑 많은 60대의 어느 목사님께서 그 찐한 사랑을 베풀고자 한 여 집사의 아파트 초인종을 남 몰래 딩동! 뜨거운 사랑을 베풀며 2층 집을 짓고 있었는데, 아뿔싸! 또 다른 딩동! 그날따라 일찌감치 귀가한 그 여 집사의 남편이 계속 딩동!

아니, 이 여편네가 뭐하는 거야!” 딩동! 딩동! 딩동! 그 사랑 충만 목사는 몹시 다급했지만 아파트에 숨을 곳이 달리 없지를 않습니까. 도리 없이 베란다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고요, 오래 버틸 수는 도저히 없었고요, 그만 난간 손잡이를 놓쳐버렸으며 땅바닥에 철퍼덕! 즉사! 그리고 소천? 글쎄요.

어떻습니까? 제가 신천지를 두둔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미 교회됨을 포기해버렸고 그 꾀죄죄한 종교기독교가 되어버린 그대야말로 차라리 신천지와 모든 이단의 원조가 아닙니까. 하기사 그대는 당연히 부인하겠지만 신천지며 다미 선교회 등등, 그들의 교리는 거의 모조리 그대로부터 파생된 것들이 아닙니까. 그대에게서 찐하게 풍기고 있으며, 결단코 참된 진리가 아니라, 사람냄새 역겨운 그대의 그 비릿한 무엇들로부터 말입니다.

 

목사님. 저는 한 때 방언이 대체 뭐길래! 미친놈처럼 방언은사를 무지하게 사모했지 뭡니까. 결국 장기금식에 들어가게 되었고요, 닷새째 날 밤. 눈앞이 갑자기 환해지더니만 하얀 모습의 예수님이 내 앞에 척하니 나타났더랍니다.

그러나 좋기보다는 기분이 영 섬뜩했었지 뭡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 자의 낯빛이 변색이 되더니만, 새까만 낯짝이며 이글거리는 시퍼런 눈빛이 되어 저를 째려보던 그 가짜 예수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온몸이 덜덜덜 떨렸지요. 그러나 당할 수만은 없지 않았겠습니까. 들었던 풍월대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가라!” 여러 시간 만에 그 가짜는 떠났지만 방언은커녕 기껏 만난 게 마귀였다니요!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요, 참담한 심정으로 기도 굴을 급히 나와 예배당에 곧장 들어가야 했었습니다. 그날의 그 새벽 예배! 그 설교말씀! “십자가는 다리야. 이 다리를 건너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 가는 거야!” “각자 기도하다 숙소로 돌아가세요.” 그러나 기도는 무슨!! 몸은 썰렁! 기분은 찝찝!

그런데, 이거야 원! 내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돌연 회개기도가 마구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글쎄! 심한 구역질과 함께 온갖 죄들이 토설되고 있었고 끝내는,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찬송이 터져 나왔었지 뭡니까.

형님. 바로 그때 아이고 야!” 하늘이 열렸었더라. 백 보좌에 앉아계셨던 진짜 주님께서 박수를 치시며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그 찬송을 저와 함께 부르고 계셨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한참이나 그러시더니만, 두 손을 뻗어 제 두 손을 꼭 잡아주시더니만, 딱 한마디 말씀! “너는 장차 많은 귀신과 싸워야 하리라.”

좋았겠다구요?” 살짝 좋기는 했었지만 방언이 안 나왔잖아요, 방언이! 하기는 5년쯤 후에 그 잘난 방언은사를 받기는 했습니다마는, “너는 장차 많은 귀신과 싸워야 하리라?” 아직도 따끈따끈한 주님의 그 말씀 말입니다.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이라 하셨거든. (10:35)

기독교여. 그대는 신에게 쩔쩔매야하는 종교인이 절대로 아니라 오히려 신이올시다.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종교의 수준을 넘어 마침내 그대는 신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선악과만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텐데!” 그 하와소원의 그 성취인 것이며, 여호와의 생기로 말미암아 그녀에게 입혀졌었던 그 꿈의 그 응답이 아니겠는지요.

다만 멍청하게도, 하와는 스스로 신이 되고자 선악과를 범하고 말았지만, 주님도 역시 우리들이 저급한 종교를 넘어 하나님과 같이곧 주님의 자녀요 신이 되기를 원하셨음이 아닙니까. 종교의 천박한 차원이 아니라, 본문의 말씀처럼 주님과 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신이요 신부로써의 참된 교회 말입니다.

그러나 답답한 그대는 신을 높이 받들어 모시는 가운데 그 신에게 복이나 비는 허접한 종교일 뿐, 참 교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의 신부는 물론, 자녀도 아니라 신에게 아첨이나 일삼는 영적거지에 불과한 종교 말입니다. 암요. 종교의 비굴함을 신앙심인양 착각을 한다거나 신은 높고 자기는 낮고 등등, 주님과 자기를 분리시켜버린 그 용렬한 겸손은 그대를 위해 죽어주신 하나님의 참 뜻은 결코 아니고 말구요.

그대는 예수 보혈로서 주님의 자녀 곧 하나님과 한 가정을 이루게 되지를 않았습니까. 진정한 가정일진데 가부장적인 으름장이 살벌한 유교 따위의 종교적 무드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 모두 다함께 오직 사랑 안에서 하나인 것처럼, 주님과 성도들은 예수 이름 안에서 영원토록 하나가 아닙니까. 그러기에 주님과 우리 모두는 예수 이름 안에서 높고 낮음이 없이 인격적으로 하나이며 존재적으로 하나(2:6)인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기본조차 망각한 그대는 유교적인 종교의 분위기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여전히 거짓겸손에 매여 있음! 예수의 피로서 이룩해 놓은 그 엄청난 신분을 상실하고 말았음! 종교들이야 가부장적인 신에게 아부와 치성을 바쳐서 복이나 받는 가족이기보다는 영적인 거지이지만, 그대는 아닙니다. 아니어야 합니다. 아비의 성을 따라 그 자녀들 역시 같은 성씨가 되는 것처럼, 본문의 말씀처럼, 그대 또한 하나님처럼 곧 자녀요 더욱 놀랍게도 주님의 신부요 아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그대여. 사탄에게 놀아나서 주님의 가족인 신으로서의 영광을 팽개치고 말았거니와, 또다시 종교들처럼의 영적거지인 종교기독교가 되어 그대 스스로 예수의 보혈을 배신하고 말았음이 아닙니까.

가령, 봉사와 충성 많이! 기도와 헌금 많이! 그래서 복 받아야지!”하는 그 너절한 종교행위들 말입니다. 신랑에게 복을 비는 거지신부도 다 있답디까? 그러나 주님의 신부인 그대만은 거지? 신에게 복이나 구걸하는 종교이며 영적인 거지들 말입니다. 간청하오니, 자신의 위치를 되찾으소서. 종교에 불과한 기독교가 아니라, 그대는 주님의 형상이요 그분의 신부이며 모든 매사에 위풍당당한 교회여야하지 않겠습니까.

사탄을 지옥에 처넣어야하는 그대만의 특별사명 말입니다. 본문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라 했거늘?” 맞습니다. 그대는 예수의 보혈 까닭에 하와가 꿈꾸던 그 차원 곧 하나님과 같이!” 천사보다 높은 주님의 자녀이며 사탄을 포획할 수 있는 신이요 신부됨의 위치에까지 높여졌던 것입니다. 그대만이 할 수 있고, 신으로써의 그대가 꼭 해야만 하는 주님의 그 창조의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또다시, 신에게 아양을 떨며 복이나 비는 영적거지요 종교가 되다니요! 물론 천주교는 그 어떤 착한 짓을 한다한들 미신이요 종교이지만, 그대는 아닙니다. 아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묻사오니, 신 곧 교회됨의 영광을 버리고 영적거지요 기독교가 되어버린 기똥찬 그대여! 세상타락의 진짜 원인에 대해 생각이라도 좀 해보셨습니까. 신 됨의 영광을 스스로 상실한 그대 탓이 아니라고 어떻게 발뺌을 할 수 있겠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충성스럽게도(?) 구국기도회니 뭐니, 별 짓을 다하지만 세상은 더욱더 썩어만 가고 있을 뿐이며, 그 거창한 종교행사들은 교통체증이나 유발할 뿐, 별무소용인 헛수고가 아니겠는지요. ! 자기망각, 자기상실 곧 간교한 겸손인 종교의 넝마를 벗기 전에는 오히려 아나함만 못한 그 너절한 종교 짓거리들 말입니다.

보십시오. 천사마저 흠모할 수밖에 없는 그 영광스러운 이며 그리스도의 지극히 고귀한 신부됨의 그대를, 어처구니없게도 사탄의 하수로 추락시킨 그 정통교리 곧 신종우상 말입니다. 그대가 목을 매고 있는 그 물건은 그대의 신부됨을 질투한 사탄이 그대를 자기 밑에 깔아뭉개고자 쳐놓은 사망의 덫이며 종교적인 올무일 뿐입니다.

그대여. 아담에게 임했던 여호와의 생기(2:7) 말입니다. 그 생기 탓에 인간은 생령 곧 성욕에 매이는 종교성향의 특이한 실존이 되었지 않습니까. 비록 생식본능이라는 멋진 가면을 쓰고 있는 성욕이지만, 넘쳐나는 성폭력, 데이트폭력, 성추행과 성희롱, 그에 따른 각종 범죄와 이혼이며 살인 등등! 어디 그뿐입니까? 종교니 우상숭배니 그것들 모조리 성욕에 맞물려 돌아가는 괴물들이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바알과 아세라와 온 세상을 미치게 만들었고 만드는 미신과 우상들! 그것들의 근본은 진정 성욕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번성이요 다산이라는 둥, 아담에게 임한 여호와의 그 생기 곧 성욕에 의한 종교들 말입니다. ! 성욕만 안주셨더라면, 아담의 코에 여호와의 생기만 불어넣지 않았더라면, 종교도 없었겠고 세상은 이처럼 더러워지지도 않았으련만! 따라서 행복했었던 인간창조가 절대로 아니오라, 각혈하듯 고통스럽게 쏟아내셨던 핏빛갈의 그 말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기독교여. 그러므로 참혹한 심정으로 묻나니, 그대는 듣고 있소? 주님의 처절한 음성을! 보고 있소? 피 뿌리듯 쏟아내는 주님의 피눈물을! 사탄에게 농락당하는 그대를 더는 볼 수가 없어 혼신의 힘을 모아 전하거니와, 제발 돌아오라! 예수 이름의 참 자유에로. 떠나라! 영적우상인 정통교리로부터.

그런데, “아니 뭐요?” 내가 그대의 교인들을 꼬신다고요? 이봐요! 내 한 몸도 버거운 터에 뭔 욕심이 있어 교인을 꼬시겠습니까. 사람 꼬심은 그대가 전문이지만, 그대는 교인숫자 경쟁이나 벌여야 하는 치사한 종교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의 자녀요 신인 그대를 스스로 짓밟는 그 거짓겸손이며 영적자학인 종교로의 퇴행 말입니다.

요컨대, 그대는 말고 참 교회는 사탄을 압도할 수 있는 엄청난 영광 그 자체라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참 하나님(9:5)이신 예수님은 죽음조차 불사하셨거니와, 부패한 종교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해 애통할 뿐이 아니셨습니까. 그러셨던 주님께서 작금의 그대를 보신다면 웃으실까? 우실까? 툭하면 등장하는 비리들하며 세상보다 한 술 더 뜨는 그대이니 말입니다. 교묘하게 헌금을 빼 돌린다거나, 집 못 짓고 죽은 귀신이라도 씌었는지 생각하는 것은 오직 건축뿐인 그대이니 말입니다.

생각을 좀 해보세요. 예루살렘성전에 대해 주님은 분연히 멸망의 예언을 하셨건만 그대는 대체 뭔 생각을 하십니까. ! 간통은 성의 자유다? 법적 허락도 났으니 이제는 거칠 것도 없어라. 음풍이 들불처럼 번지겠지요. 안 그래도 발정한 개떼들이었으매 바야흐로 신나는 판국이 아닙니까? 그러나 기똥찬 그대는 오직 건축 또 건축, 분명히 그러하리라.

 

목사님. 두서없는 제 얘기의 흐름입니다마는, 신학교 졸업 후, 이거야 원! 오라는 데가 있나 갈 데가 있나. 기도한다는 핑계로 밤마다 종종, 하릴없이 종종, 소위 영산이라는 삼각산을 오르곤 했었지 뭡니까.

그 날도 그랬고요, 기분이 영 꿀꿀했고요, 서울의 야경을 아스라이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처량하던지, 얼마나 한심하던지! “저 많은 불빛들 중에서 날 오라는 따뜻한 손길은 하나도 없네. 집은 물론 방도 한 칸 없고! 애들 엄마는 죽을 똥 살 똥 힘들어 하는데, 나는 이러고만 있다니!” 뭐 그런 거 말입니다.

그런데 형님. 대체 어떻게 알고서 산 속 그 깊은 곳에까지 나를 찾아왔었는지요. 경국지색이리만치 빼어난 미모에다가 배시시 웃고 있었던 그 잡것이 말입니다. 코앞에까지 다가와서 몸을 배배 꼬면서 추파를 던지던 그 마귀 말입니다. 물론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냅다 고함을 질렀지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꺼져버려!”

한참 만에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그 X는 떠났지만, 변장술의 달인 마귀가 아닙니까. “미녀 마귀였으니 서운했겠다구요?” 형님도 참! 기도라도 쫌 깊이 하겠노라 찾아들곤 했었던 산 속에까지 그 X가 따라오다니! 하기는 정신이 말똥말똥해졌고요, 기도로서 온밤을 꼬박 지새울 수 있었고요, 그 날은 기이한 밤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고전6:18)

 

기독교여. 그분이 그처럼 고상한 취미를 가졌을 줄이야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기독교계를 온통 쥐락펴락하던 그 거창한 목사께서 나비채집이라는 고상한(?) 취미를 즐기고 계셨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과문한 촌놈이라서 묻사오니, 그분이 잡으러 다니셨다는 그 나비가, 호랑나비? 노랑나비? 부인나비? 혹시 나비부인? 프랑스 파리에까지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나비부인 채집에 인생의 노년을 훨훨 태우고 다니셨다는 정염의 그 황당한 방화사건 말입니다.

하기사, 그분과 그의 추종자들은 명백한 물증 앞에서도 극구부인을 합디다마는, 김홍도의 황묘농접도따위는 쨉도 안 되고요, 그 거대한 목사의 실로 아슬아슬했었던 그 엽기적인 카사노바 행각 말입니다.

그런데도, 매우 활달한 그대는 오늘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계속, “예수 믿으면 살아서 복을 받고, 죽은 후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그대의 그 잘난 전가의 보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부처 믿으면 죽은 후 극락에서 잘 살 것이고, 예수 믿으면 죽은 후 천국에서 잘 살 것이고? 그러나 죽은 후에 잘 먹고 잘산다는 데는 둘 다 별반 차이가 없지를 않습니까? 혹시 예수가 부처보다 더 쎕니까? 천국이 극락보다 더 좋습니까? 그래서 부처 말고, 예수 믿어야 합니까?

웃자는 소리입니다마는, 까짓 놈의 꺼, 죽은 후 편한 바에야, 극락이든 천국이든 아무 데나 가서 잘만 살 수 있다면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니라면 혹여 불교의 극락은 뻥이고 그대의 천국만 진짜? 그런 겁니까? 아닙니까?

그대여. 아직도 모르겠는지요. 그대와 불교 간의 해묵은 싸움의 그 원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농담과도 같은 그대의 천국관이며 그 잘난 정통교리 말입니다. 요컨대, 자기들의 예수가 가짜인지도 모른 채로 살인을 일삼던 사람백정 십자군들과, 지금의 종교 따위인 그대가 정녕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까. 십자군들은 보이는 칼로써 보이는 사람을 죽였을 뿐이지만, 그대는 안 보이는 칼인 정통교리로써 더욱 고귀한 영혼을 죽이고 있음이 아닙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 잡는 흉기인 그대의 예수 말입니다. 정통교리로서 폼 나게 미화시켜놓은 그 예수가 과연 진짜일 수 있겠으며, 그런 예수가 왕으로 똥폼을 잡고 산다는 그대의 천국이 어떻게 참일 수가 있겠는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건만, 굳이 죽은 후에야 간다는 그대의 그 신나는 천국과 지옥의 분기점 말입니다. 사람인 그대에게 좋아야만 천국이고, 안 좋으면 무조건 지옥? 생시에 어찌 살든 간에, 믿기만 하면 죽는 순간 천국에 간다는 그 순발력 좋은 순간교리이며, 성경에도 없는 그 막말은 대체 누구의 어록입니까?

 

목사님. 기왕에 이리 된 바에야 홀랑 까발리려고 합니다. 저를 심각하게 바라보던 의사의 표정도 예사롭지는 않았던 것 같고요, 그러니 사람 눈치나 보면서 할 말? 안 할 말? 그 무슨 사치이겠는지요. 오로지 진실뿐! 사실뿐! 시한부 종말론자의 난동보다 훨씬 전, 저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지 뭡니까?

예수(?) , “너는 1987619일 자정에 휴거되리라!” “! 휴거?” 어깨춤은 절로! 콧노래는 흥얼흥얼! 내 생애 최고의 나날들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휴거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정말일까? 내가 혹시 속은 건 아닐까?” 하지만 휴거라는 것이 워낙 매력적이다 보니까, “의심 마귀야 물러가라!” 그러고 말았다니까요, 글쎄!

드디어 휴거의 날! 똑딱똑딱 시간은 흘렀고, 마른 침들은 연상 꿀꺼덕! 결국에는 자정! 그러나, 그러나, 휴거는 무슨!! “아차! 사탄에게 속았구나! ! 또 속았어!” 저절로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아니, 이럴 수가!”

허구한 날 헤매고 다녔고요, 누구랄 데도 없이 마치 나 자신에게 하듯 마구 욕을 퍼붓곤 했지요. “그 잘난 기도요?” 나올 턱이 없었지만, 물론 주님의 큰 은혜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그 통한의 속았음 후, 반 년 쯤 후! 마침내!

진짜 하나님! 참 잘 하셨습니다요. 교만덩어리인 제가 아니었습니까. 그러기에 그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시고자, 사탄의 속임을 방임할 수밖에 없으셨던 진짜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죄송하고요. 다만 저 때문에 황당해 했었던 가엽은 성도들을 보살펴주소서, 제발! 한 사람도 낙오 없이 진짜 천국에서 다들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제발! 저 또한 다시는 사탄에게 안 속도록, 진짜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소서, 제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진짜로요. 아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2:22)

 

기독교여. 하나님께서 인간교회에게 주님의 몸이라는 굉장한 칭호를 주셨습니다마는, 나도 이지만 내 몸도 나 자신이 아닙니까. 나와 내 몸은 분리불능의 하나이듯, 교회가 주님의 몸? 그렇다면 교회도 하나님? 교회 및 인간의 시조라고 말할 수 있는 아담 말입니다. 독처함이 좋지 아니하여 또 다른 사람 하와를 만들어주셨다는 성경이지만 그 책의 안 보이는 속뜻도 과연 그럴까요?

아담의 고독에 대한 주님의 해결 방법인 하와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적고 있지요. 그러나 성경’ ‘글자들의 숨겨진 행간이며, 그대의 정통교리보다 더욱 깊을 수밖에 없는 진리의 신비 곧 구속사관 그 이전적인 무엇이, 보이는 성경의 안 보이는 속뜻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은 혹 아닐까요?

성경책 스스로 밝히고 있듯(5:39), 모든 성경은 인간구원만을 위한 종교경전이기보다는, 주님 자신을 위한 무엇이올시다. 따라서 그대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진실이라면, 정말로 그렇다면, 성경’ ‘글자들만의 뜻풀이로써 이룩된 이른바 구속사적 피상성에만 함몰되기보다는 보이는 성경의 안 보이는 속뜻이며, 그대의 주님께 혹 있을 수도 있는 그 어떤 절박한 무엇에 관해서도 고민해야만 하지 않겠는지요.

성경책을 통해 꼭 만나야 하는 다시, 성경책의 안 보이는 속뜻을 꼭 깨달아야 하는 그대만의 그 중대한 사명 말입니다. 가령, 아담이 하와를 본즉 뼈 중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단박에 뿅 가버렸다는 성경이지만, 그 책의 글자풀이인 정통교리보다, 주님의 속살 내음이랄찌, 찐한 피 냄새로 가득한 성경책 이면의 그 심각성 말입니다.

물론 그대는, 이 촌놈의 말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노라고 이미 심증을 굳혔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여 그대가 몹시 보고 싶었건만 막상 직면을 하자니 무척 힘이 들구려. 다만 간청할 뿐이오니, 귀라도 잠시 빌려줄 수는 도저히 없겠는지요.

보십시오. 성경책 가로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하와를 보자마자 도대체 얼마나 좋았기에 아담은 대번에 정신 줄을 놔버리고 말았고 그를 여자라 칭했지만, 그가 하와를 만나는 그 기막힌 사건 말입니다. 과연, 과연, 여호와는 정말로 모르셨을까요? 아담이 홀로는 외로워 견딜 수 없음을 처음에는 모르시는 채로, 덥석 아담 하나만을 지으셨을까요? 여호와는 다 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아담의 한계성을 모르셨다면, 한치 앞도 모르는 그런 분을 어찌 전지하신 창조자라 부를 수 있으리!

그러므로 성경책 그 이면으로서의 속뜻은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아니라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도 못한 창조주는 무슨!! 순 엉터리 사기꾼이든가! 그렇지 않고야 해석불가의 성경책이 아닙니까. 하기는 정통교리로서 밥줄을 이어왔었던 그대이므로 저에게 이단이라고 침을 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기에 그대 곁에 다가가기를 엄청 망설였지만, 몹시 싫기도 했지만, 이토록 촉급해짐은 혹여 성령께서 내게 주신 심정인가 싶어, 이 못난 글을 남기고자 함이올시다.

묻사오니, 교회됨의 영광을 버리고 불교 등의 잡종교로 전락해버린 기독교여. 그대는 아는가, 주님의 마음을! 그대는 듣는가, 주님의 신음 소리를! 그대만을 그리워하며 그대가 교회되어 돌아와 주기를 몽매에도 사모하시는 그 주님을 말입니다. 아버지(9:6)이시며 예수이신 그 한 분 하나님의 서러워 애통하시는 소리, 소리! 주님의 피눈물 듣는 소리, 소리! 부디 귀 열고 마음 열어 꼭 좀 들을 수 있게 되기만을 간절히 청하나이다.

 

목사님. 신비주의자라는 오해가 징그럽고 싫습니다마는, 내 나이 열여섯 적에, 뭔가에 씌운 것처럼 이상한 짓만 골라하며 다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또한 겁도 없이 거의나 90도 각도의 가파른 절벽을 맨손으로 오르고 있었고요. 거지반 정상까지 도달하게 되었고, 얼굴을 바위에 밀착한 채로 한쪽 손만으로 더듬어 찾고 있었지요. 짚고 오를만한 홈 따위를 찾고 있었지만, 사방을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짚어지는 것마다 반질반질! 사방이 뺀들뺀들! 붙잡을만한 한 군데도 없었지 뭡니까.

! 이제 죽는구나.” 내려갈 수도 없고 올라가자니 붙잡을만한 아무것도 없고, 얼마나 절망이 됐는지요. “기도요?” 세상에 이미 푹 빠져있었기에 기도는 무슨!! 머릿속은 온통 하얘지고 있었을 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님. 행여 떨어질 새라 소리도 크게 못 내면서 온 몸을 바위에 찰싹 붙이고 울고 있던 바로 그 때! 넝쿨 같은 것이 내 눈 앞으로 스스로 내려오지 뭡니까. 한 손을 뻗어 그것에 대자마자, 이거야 원! 제 몸은 누구의 힘이었는지 전혀 모를 일이로되, 저절로 바위절벽 위에 안전하게 세워져 있더라고요, 글쎄! “뻥 까고 있네!” 진짜로요.

기독교여. 에덴동산 그때 거기에서의 창조주와 사람과 뱀 곧 사탄! 이 삼자간의 수상쩍은 면면들하며, 도저히 납득 못할 비보통의 사실 등등! 성경은, 성경은, 너무나도 아프게시리 그것들을 마치 뜨겁고도 흥건한 피와 눈물처럼 잔뜩 머금고 있건만, 그대의 비상한 방문을 곧 진지한 깨달음을 갈급해하고 있건만, 비겁한 그대는 정통교리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얼씬도 못하고 있음이 아닙니까.

하지만 작금의 현실 말입니다. 그대의 비열한 기회주의를 용납 못할 지경으로 이미 푹 썩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보세요. 애와 노인들까지 음란의 노예들이 되었고 분노조절장애에 걸렸다랄찌, 제 자식조차 돈 몇 푼에 간단히 죽음으로 내몬다거나, 지금은 정녕 정통교리에나 안주하면서 숫자놀음을 즐겨도 될 만큼의 한가한 시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몇 년 전만해도 주교사들은 응당 무급봉사자였지만 이제는 돈에 팔려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닌다거나, 성직매매랄지, 구린내 물씬한 그대의 현주소 말입니다.

다만 제가 진부한 얘기를 새삼 꺼내는 까닭은 오직 그대! 성경에 대한 몰이해이며, 보이는 성경의 보이는 글자들에만 집착을 뿐, 진정 소중한 성경책 속의 안 보이는 참 진리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강퍅하고도 얄팍한 바로 그대! 교회의 영광은 벌써 포기해 버렸으며, 사탄의 술책인 그 천박한 정통교리요 영적우상이며, 그 누추한 똥통 속에 이미 풍덩 빠져버린 오직 그대 때문이올시다.

그대여. 어디가 교회이며 무엇이 교회입니까. 돈과 사람의 숫자만이 초미의 관심일 뿐, 종교라는 미명 하에 폼 나게 위장은 됐지만, 차라리 시정잡배만도 못한 그대! 그러한 그대를 그 누군들 교회라고 불러줄 수가 있으리.

그런데도 자칭 교회? 교회는 무슨!! 휑하니 놓여있는 기독교의 장신구들 뿐, 복 타령의 괴성들만 난무하고 있을 뿐, 참 자유요 교회다움은 차라리 전설이 되었고, 세상 흉내 내기에만 몰두해있는 그대가 아니겠습니까.

그대가 싫어 썰물처럼 떠나고 있는 교인들 말입니다. ? ? 저들의 관심을 끌만한 프로그램이 없어서? 말도 아니거니와, 영적우상인 그 정통교리의 술수를 감지조차 못하고 있는 그대의 어리석음! 진정 그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의 영광은 소리 소문도 없이 사탄에게 씹히고 말았고 성경이기보다는 성경’! 성경말씀이기보다는 그 책의 글자! 그것들만을 붙이고 꿰매고 마침내 거대한 공룡으로 떠오른 그 잘난 정통교리님 말입니다. 그대는 그 분과 찰떡궁합이 되어 있고요.

그리하여 아무라도 그 정통교림님 밖으로 눈길만이라도 줄라치면 당장에, “너는 이단!”하면서 정통교리님의 광팬을 자처하는 그대가 아닙니까. 사실이 그렇건만, 그대 스스로는 자기가 교회라고요? 개그가 따로 없음이올시다.

깊이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성경책에 대해 많은 질문들이 마땅히 있어야 했었으며, 교리를 달달 외우느라 세월을 낭비하기보다는 더욱 깊은 진리를 위해 구도의 삶을 살아야 했건만, 그대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천주교 못지않게 세상의 현란함에 환장하고 말았고, 세상 왕 사탄에게 포로가 되어버린 그대! 주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으며, 정통교리님의 명령에만 온갖 충성을 다하고 있는 기똥찬 그대가 아닙니까.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건데? 정통교리의 선창에 따라 복창이나 하고 있는 그 유치한 종교행위가 아니라, 사탄의 올무요 영적인 우상 곧 그 정통교리로부터 벗어나고자 애라도 좀 써봐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대의 신이신 그 잘난 정통교리님 말입니다. 신학자요 호위무사들의 철통경호를 받고 있는 왕 중 왕인 것이며, 성경을 구속사로만 요리한다거나, 주님만을 위한 무엇은 알 것도 없다는 그대의 똥배짱 말입니다. 그 누구라도 그대의 영원한 주님이신 그 정통교리님께 살짝 불평만 할지라도, 잔인하게 이단의 철가면을 씌워 당장에 골로 보내고 있는 열렬한 충성심의 피 끓는 그대여! 그 잘 빠진 정통교리님께 무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그대여! 과연 기똥차구나. , 거룩하도다. 진실로 기막힌 그대가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정통교리님께 대를 이은 충성은 물론, 그 잘난 것을 위해 목숨마저 바칠 수 있사오니, 진정 잘 빠졌도다! 참말로 멋지도다! 그러나, 그러나, 교회는 무슨!! 종교요 기독교인 그대 자신 말입니다. 정통교리님의 품에 안겨서 젖만 쪽쪽, 잠만 쿨쿨! 신부됨의 성숙은 전무한 채로, 참 신랑이신 주님의 마음일랑은 전혀 헤아릴 수도 없는, 이천년 묵은 애기요 몸만 굵은 거대한 애기인 그대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심히 답답할찐저, 예수 재림은 신부를 찾아오시는 혼인재림이건만, 그대는 늘 정통교리에만 찰싹 붙어 앉아 젖만 빨고 있사오니 신랑은 재림하고 싶으셔도, 혼인하고 싶으셔도, 성년인 신부가 없기에 오실 수가 없음이올시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기와의 혼인이 가능키라도 하겠는지요. 그대는 너무 어려서! 젖내만 폴폴 나서!

청컨대, 그 비릿한 젖 맛에만 빠져 있지 말고, 어른흉내라도 낼 수는 도저히 없겠는지요. 보이는 것은 단지 성경뿐이지만 원저자이신 성령님께 묻고 물으면서, 성경그 속에 깊이 숨어계실 수밖에 없으신 그 주님을 곧 그 진리를 만나드리는 곧 깨달아 드리는 그것만이 그대의 남은 사명이 아닙니까. 괜한 소란들을 피우지 말고 말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2:7,8)

기독교여. 에덴이라는 그 신비의 동산 말입니다. 보이는 성경의 글자의 뜻만으로는 환희와 기쁨이 맞지만, 흉측한 뱀이 그곳에 있었는데 에덴이라니요? 그 무슨 터무니없는 말입니까. 아무튼, 뱀과 하와와의 묘한 엮임이 있기 전, 인간 아담은 모든 만물에게 이름과 특성을 부쳐줄 만큼 실로 대단한 천재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 곧 주님을 쏙 빼닮은 아담 위의 나는 놈 그 뱀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무슨 뜻입니까? 가장 간교하다는 그 뱀 곧 가장 지혜로웠다는 그 뱀! 누구의 초청도 받은 적이 없건만 그 뱀이 왜? ? 어떻게? 에덴동산에 있었다는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창세기 2장 말미에서 사람 둘이 만나게 되었고 살 중에 살이라니, 뼈 중에 뼈라느니, 시인이 울고 갈만한 낭만적적인 묘사로서 성경은 당시의 아담의 심경을 적고 있지만, 바로 그때! 성경은 또한 매우 심각하게도, “뱀이 있었는데 그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곧 그 뱀이 왕똑똑이었더라. 그러나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아담은 여호와의 국화빵이었기에 아담만한 똑똑은 있을 수도 없었건만, 그 뱀은 대체 누구를 닮아 그리도 지혜로웠을까요? 하와를 간단히 속일 수 있었을 만큼 똑똑 자체였었던 출처 미상, 기원 미상, 바로 그 뱀! 아담이 받은 하나님의 형상 곧 여호와의 똑똑을 너끈히 이겼었던 그 뱀! 곧 사탄이 아닙니까. 요컨대, 성경책에는 육안만으로는 결코 읽을 수없는 신비한 면면이 있다는 것이며, 성경이기보다는 신령의 무엇으로서 슬프신 하나님의 그 피눈물의 결정체가 바로 참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암요. 성경의 모든 사건은 우발적 무엇이 절대로 아니오라, 창세전에 겪으셨던 주님의 그 아픔, 그 고독, 그것들의 구체적인 문서화가 성경이고 말구요. 비록 인간의 사건을 통해 에둘러 적고는 있지만, 그 속에 응축되어있는 주님의 옛 본질 옛 생기 곧 그 이름 여호와 까닭에 사탄에게 받으셨던 그 큰 상처이며 그에 관한 하나님 자신의 은유적인 자기고발, 자기폭로 곧 구약성경책이 아니겠습니까.

! 성경책의 안 보이는 속뜻으로서 꽁꽁 감출 수밖에 없으셨던 주님만의 아픔인 것이며, 그것을 치유코자 친히 마련하신 주님 나름의 처방전이며, 그 꿈과 소망의 실천계획서가 바로 성경책인 것입니다. 만일 성경책이 인간구원만을 위한 종교경전이라면 굳이 흉측한 일들로서 성경책을 채워 놓아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를 않겠습니까.

하기는 그대의 덕담 말입니다. 추한 일들을 여과 없이 기록해 놓았기에 성경책은 더욱 믿을만하다는 그대이지만, 성경은, 성경만, 창세전 영들의 영적사실에 관한 현장 검증적 무엇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그때의 누추한 비밀들을 낱낱이 공개할 수밖에요.

 

기독교여. 주님의 이름이며 그 본질 고대로의 구약성경책이지만, 그 최초의 결혼식 말입니다. 축하예물로써 가나 혼인 때처럼 맹물로 만든 극상품 포도주는 못 보낼지언정, 뱀을 떡하니 등장시키고 있는 이상한 성경이 아닙니까.

보십시오. 주님이 아담을 위해 에덴동산을 만드셨다는 그대의 정통교리이지만, 과연 그럴까요? 성경 어디에도 뱀보다 먼저 아담을 지었다는 증언이 없고 보면, 말이 좋아 에덴일 뿐 그곳의 최초의 입주자는 아담이기보다는 혹 뱀이 아니었을까요?

그 수상한 뱀 말입니다. 그것의 창조시점도, 어떻게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도, 성경은 그 연유를 비밀에 부치고 있지 않습니까. 하여 에덴동산의 불청객은 오히려 아담이었으며, 주님이 의도적으로 당신을 꼭 닮은 아담을 만드사, 그를 슬쩍 뱀의 동산 에덴에 끼워 놓으셨음은 혹 아니겠는지요. 하와마저 동반시키시면서 말입니다.

목사님. 별 일이 다 있었지 뭡니까. 지금은 재개발이랍시고 당시의 흔적마저 없어지고 말았지만, 제 나이 열 살 적에는 금호동 앞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있었고요, 막 장마가 끝난 터에 강물은 불어나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저로써는 그것의 위험성을 알 턱이 없었지요. 다만 예쁜 조약돌을 줍는 재미에 푹 빠진 채로 한 개씩 두 개씩, 조약돌을 건져서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점점 물 깊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더랍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바닥이 급하게 침하된 수심 깊은 곳에 빠지게 되었고요, 급물살에 휘말리게 되었지 뭡니까. 물에 빠진 이들마다 어푸어푸난리도 아닙디다마는, 제 경우에는, 제 기억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었고요, 죽음의 공포 따위는 전혀 없는 채로 참으로 기분 좋게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렀더랍니다.

그런데 이거야 원! 거지반 편안히 죽어가던 저를, 제 가슴을, 번쩍 들어 올렸던 거대한 손 같은 것이 있었지 뭡니까. 로봇도 아닌 것이, 사람의 손도 아닌 것이, 어디선가 돌연 나타났고요, 소용돌이에 휘말리던 저를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만 모래톱 위에 척하니 내려놓고는 감쪽같이 사라졌었던 그 거대한 손인지, 뭔지! !

지금 와 생각해보면 얼마나 야속한지요. 만일 그때 그 괴상한 손인지 뭔지! 그것의 훼방인지 구조인지! 그것만 없었더라면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겠고 이 꼴 저 꼴 안 볼 수 있었을 테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순 거짓말! 뻥치고 있네.” 진짜로요.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위에 있고 나팔소

리가 심히 크니 .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19:16)

아시는 것처럼, 본문은 여호와 임하심의 그 굉장했었던 광경이올시다. 새벽에 몰래, 아무도 몰래, 조용히 부활하셨던 예수와는 현저히 대비가 되는 여호와의 강림이 아닙니까. 한 분 하나님의 두 이름이건만 왜 그토록 달랐을까요? 은밀하셨던 예수부활이었던 반면에, 여호와는 떠들썩하게, 그것도 시내산 정상에 홀로 높이 강림하지 않았습니까.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한 분 하나님의 두 이름 곧 예수와 여호와 말입니다.

 

기독교여. 하나님은 이제와 영원히 오직 한 분뿐이라는 이 영원한 진리에 대해 과연 동의를 하시는지요. 여호와도 예수도 따로따로의 신들이 아니오라, 하나님의 두 이름일 뿐이며, 두 이름을 지니신 유일신께서 예수 때와 여호와 때에 왜? ? 그리도 큰 차이를 보이셨던가 하는 그 중대한 의문 말입니다.

그대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들릴지언정 성경은, 참 성경은, 보이고 읽히는 이기보다는 그 책 속에 안보이지만 도도히 흐르고 있는 생명의 실존이 아니겠는지요. 그 진리의 그릇인 성경역시도 받들어 봉독하는 종교경전이 결코 아니라, 세상유일의 독특한 무엇이고 말입니다. 비록 인간문화인 글자들로 기록이 되어있지만 그것은 단지 임시성일 뿐, 성경책을 통해 우리들이 반드시 만나야하는 곧 반드시 깨달아야하는, 주님의 그 간절한 꿈과 소망 자체 곧 성경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과 구체적인 인간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 성경은, 성경책은, 종교경전으로서의 한계성을 넘어, 하나님 자신의 자기현현이라 할지라도 무방하지 않겠는지요.

요컨대, 예수 이름의 조용하셨던 부활과는 달리, 그대에 의해 높이 받들어지고 있는 그 요란한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옛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유일신 되심을 사실은 부정하면서, 여호와는 아버지이고 예수는 또 다른 신으로서 여호와의 아들이고 등등, 유일신관이 아니라 다신론이요 종교적인 3신론에 사로잡혀 있는 그대는 도리 없이 이단일 수밖에 없지를 않겠는지요. 물론 자신만이 정통이랍시고 큰 말을 하는 그대는, 이 촌놈을 향해 당연히 뿌드득 이를 갈겠지만 말입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3:15)

기독교여. 본문은 교회의 영광을 밝히는 중대한 성경이올시다. 주님의 신부요 교회에게만 입혀주신 그 엄청난 자유 말입니다. 하오나 그 자유를 위해 그대를 교회로 세우셨건만, 그토록 쉽게 예수상실, 자유포기! 대체 왜 그랬는데?

보십시오. 영계에는 회색이 없나니 하나님 혹은 사탄!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인 연옥을 주장하기에 천주교는 교회가 아니거니와, 그대 또한 아슬아슬한 실태이면서도 왜들 그렇게 히죽거리는 것입니까? 은혜만 받으면 기쁨이 넘친다는 그 막말 말입니다. 그것은 진정 주님께 대한 욕이라는 것을 왜 모른단 말입니까.

제발 눈을 떠서 바라보세요, 작금의 세상을! 제발 귀를 열어 들어보세요, 만민의 탄식소리를! 비참과 서러움이며, 갑질을 해대는 못된 것들의 멸시와 모독 탓에 눈물과 탄식이며, 어디 그 뿐이런가! 죽을 용기마저 없기에,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수수 많은 사람들하며, 태아의 목숨을 잔인하게 지우고 있는 이 세상이건만, 그대는 정녕 무에가 그리도 좋아서 실실거리면서 다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묻나니 대답하라 그대여! 남이야 어찌되든 말든, 은혜 충만 받았은즉 웃음이 절로 나오던가? 잔인무도한 돌가슴, 돌마음들이여! 대관절 누구의 은혜를 받았으며 그 따위 은혜를 내려준 자가 누구인지, 대답하라 그대여!

만일 인간 모두를 사랑하시는 진짜 하나님께 진짜 은혜를 받았다면, 그래도 웃음이 나오겠는가? 이러한 판국에 주님이 웃으시려는지 우시려는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헤프게 웃고 있는 그대, 참으로 돌 심장이 아닙니까. 보세요. 한 마리 양을 찾아 온 산을 헤매시는 진짜 하나님은 시방 펑펑 울고 계시리라! 그대의 종교 됨이 너무너무 서러워서 몹시 울고 계시리라, 분명히 그러하시리라!

따라서 제아무리 매정한 그대일지언정 참 하나님께 참 은혜를 받았다면 안 울고 배기겠는지요. 그런데도 물색없는 그대는 여전히 계속 건축 또 건축뿐이지만, 과연 누구를 위한 집이며 무얼 위한 물건입니까. 하나님? 절대로 아닐 터! 불법조차 망설임이 없이 지어놓은 그 물건은 정녕 누구를 위한 괴물인 것입니까?

이보시오. 마침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졸병이 되었구려. 그렇지 않습니까. 자유를 버렸고 자유 밖으로 멀리멀리, 결국은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말았더라. 그토록 어여뻤으며 그리스도의 자랑스러운 신부인 그대였건만, 교회다움의 그 멋스러운 자유는 아예 전설이 되어버린 가운데 이제 그대의 본색은 딱한지고! 사탄의 졸개가 되었다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하나

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6:24)

기독교여. 본문을 말씀하시던 그 순간! 심히 격렬하셨을 주님의 심정에 관해 생각을 좀 해보셨는지요. 성경에는 참으로 멋대가리 없이 밋밋하게 쓰여 있지만, 천국의 영원생기라고 할 수 있는 그 중대한 산상수훈이며 그 중대한 주기도문의 폭로 바로 그때! 바로 거기에서! 돌연 뱉어내셨던 주님의 이 말씀은, 본문의 말씀은, 작심하사 선포하셨던 주님의 그 비통한 속내가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맞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종말적 함성입니다마는, 하나님 외의 또 다른 주인은 대체 무엇인 것일까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과 그대가 환장하는 돈 곧 불구대천의 원수요 사탄 자체인 그것 외에 또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뭐야! 무식한 촌놈 주제에 감히 뭐라고! 너는 이단임에 틀림없어!” ! 저에게 별 말을 다한다한들 어떠하리. 다만 간청하오니, 제발 돌아오시게, 사탄이 아닌 참 하나님께로! 제발 떠나시게나, 사탄의 꼼수인 정통교리로부터! 사탄을 만만히 봐서는 안 되고 말구요. 그 악마는 에덴동산조차 혁파하고 말았거니와, 예수에게 시험을 걸었을 정도로 사탄의 지혜와 그 위세는 실로 굉장하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탄에 대한 경배를 주님향한 충성으로 착각하게 만든다거나, 진리에 대한 배신을 은혜 받은 양 미치게 만든다거나, 사탄은 보통 놈이 아니올시다. 또한 꼭 아실 것은, 성육신 때 외에는 주님은 영원히 영이요 생명이시듯, 사탄 역시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실 소망 겸손 사랑 등등 하나님 자신이시며, 절망 교만 거짓 배신 음탕 등등 타락한 시대정신과 세계를 혼돈케 하는 영적인 무엇들 모조리 사탄 자체인 것입니다.

요컨대, 그대가 하나님과 사탄을 혼동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박사학위가 부족해서도 아니며 신학공부의 부실함 때문도 아니라, 그것은 단지 영적인 무지 탓이라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성부? 성자? 성신? 유일신관은 말만의 유희일 뿐, 그대의 인식은 차라리 다신론이며 하나님을 셋으로 쪼개놓지를 않았습니까. 그 중대한 유일신 신관조차 사실은 없사오니, 영적존재들에 대한 올바른 분별이 과연 있을 수가 있겠는지요.

그대여.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여호와와 예수는 따로따로의 두 신이 결단코 아니오라, 하나님 자체인 말씀의 성취를 위한 주님의 두 속성, 두 이름일 뿐으로서, 하나님은 영원히 한 분뿐이시라 함을 부디 잊지 마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암요. 여호와로 죽고 예수로 살고, 종교로 죽고 교회로 살고, 그러한 각고의 수고가 없을진대 그 누구라도 예수이름 자신이신 유일신 성령으로부터 가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지금의 그대와 꼴통의 천주교처럼 누추한 잡종교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시여! 악마의 수작질은 배신과 이간질로부터 시작이 됐지만 주님의 품성은 그때나 영원히 보듬어주심이 아닙니까. 진노를 거두소서! 돌아와 주소서! 기독교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사랑하노라 진심으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목사님. 꼭 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은 깡그리 휴지가 되고 말았고 사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겨웠는지 모릅니다. 그럼요. 몇 번씩이나 죽어버릴까도 생각은 했지만 죽지 못해 살아 있을 뿐이었더랍니다.

그런데 형님. 그토록 절망 속에서 뭉개고 지내던 이 아우 앞에 하와가 나타났지 뭡니까. 얼마나 곱던지, 얼마나 좋던지, 마치 한 송이 들꽃을 보는 듯 했다니까요. ‘뼈 중에 뼈라느니, 살 중에 살이라느니들은 적도 없었지만, 내 속에서 풍덩하는 굉음이 들렸다고나 할까요. 후끈한 성령의 은혜가 없었는데도 옛 습관도 싹 지워졌고요.

그러나, 나 원 참! 그녀로 말미암아 모친과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었지 뭡니까. 그도 그럴 것이, 모친께서는 신부며 신혼집이며 다 마련해 놓으신 채로, 저만 유학길에 오르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셨건만 느닷없이 안가겠다고, 못가겠다고, 그것도 애인이 생겼다고! 온 집안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큰 아들놈 장가보내겠다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큰 무리를 마다치 않으셨건만 못 간다고, 아니, 안 가겠다고, 그 이유도 한심하게 여자 때문이다?” 부모님과 저와의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고나 할까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 지혜

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3:6)

 

기독교여. 말이 좋아서 에덴동산일 뿐, 그때 거기에서 대관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담과 하와 말입니다. 엄청 좋아들 했은즉, 그 둘은 짝짜꿍이 되어 항상 붙어 다녔으리라. 그런데 바로 그날! 통한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었던 바로 그날! 아담과 하와는 어쩌자고 따로따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며, 더욱이 납득이 안 되는 것은, 여호와는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계셨더란 말입니까.

사후약방문도 유분수가 아닙니까. 이미 홀랑 엎질러진 물이 되었건만, 선악과는 이미 씹혔고, 벌써 삼켜졌건만, 도대체 여호와는 어디에서 뭘 하시다가 너무나도 뒤늦게 느적느적 나타나셔서 기껏 하신다는 말씀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보세요. 무식한 촌놈일지언정 그대의 기똥찬 교리를 왜 모르겠는지요. 주님은 자유의지적인 사랑을 위해서 개입치 않았다는 그 멋진 정통교리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 후속 결과는요? 인류 역사 내내 피와 눈물이 강을 이룰 만큼 큰 후유증을 낳을 텐데, 그런데도 자유의지적인 사랑? 그게 그리도 대단한 것이겠는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뱀이 하와에게 접근하던 그때, 그녀가 선악과를 쳐다보던 바로 그때, 아니 말로 손을 뻗어 그걸 따던 그때에라도, 정 뭣하셨다면 그것을 입에 넣으려는 바로 찰나에라도, “아서! 먹지 마!”라고 한 말씀이라도 해주셨다면 엄청 좋았을 텐데!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봤고, 땄고, 이제 막 먹으려던 그 순간, 저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주님이셨다면 마땅히, “먹지 마! 큰 일 나.”라고 막았어야만 사랑! 그래야만 사랑! 아닙니까? 그러나 여전히 자유의지니 뭐니, 그 무슨 말라빠진 사랑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해도 해도 너무하셨고, 늦었어도 너무너무 늦게 나타나셨던 여호와 말입니다. 만일 그대의 교리대로 자유의지인지 뭔지, 그 따위 까닭에 주님의 간섭이 유보되었다면 연이거니와, 정말로 그랬을까요? 그대의 정통교리가 맞을까요? 늦을 수밖에 없으셨던 그 연유가 나변에 있겠는지요.

그럼요, 그럼요. 다만, 그럴 수밖에 없으셨더라. 성경그 속의 안 보이는 성경으로서의 하나님의 그 비참 말입니다. 선악과 유린 후, 오고 오는 세대 계속, 죽고죽임이며 그 참혹한 눈물 피눈물! 하나님이 짱구입니까? 차후에 그리될 수밖에 없음을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런데도 늦어야만 했었고, 뱀의 수작질을 모르는 척, 못 보는 척, 방임하셔야 했었던 가엽은 그 주님의 창조의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그대여. 하와가 고개를 쳐들어서 봤고, 손을 뻗었고, 그 선악과를 땄고, 마침내 꿀떡! 그것은 진정 인류 최악의 사건이었으며 육이오 전쟁과는 비교도 안 될 만치 가장 끔찍한 그 사건! 사람들의 선악과 식사 말입니다.

그런데도 왜? ? 주님은 방관만 하셨을까요? “, 그거! 너는 워낙 무식한 촌놈이라서 모르겠지만 주님이 인간을 지으신 이유는, 저들을 통해서 자유의지적인 사랑을 받으려고 그러셨다니깐!” 그럴까요? 왜 생각의 지평을 못 넓히는 겁니까. 정통교리를 넘어, 성경을 통해, 무언가를 계시하시는 주님의 그 큰 고독과 아프심에 대해 고민이라도 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말입니다.

예컨대, 아이가 홀로서기를 바라는 부모일지라도, 만일 자기 아이가 시뻘건 불을 향해 기어간다면, 이제 막 그 불덩어리를 손으로 집으려한다면, 그때까지도 가만 놔둬야해! 지금 간섭하면 아이를 강하게 키우려던 수고가 말짱 꽝이 된다니깐!” 과연 그러겠는지요. 악마나 그러할 뿐,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일진대, 그 위태한 순간만큼은 간섭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으로라도 당장에 막지를 않겠습니까.

당연하고 말구요. 주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강제로라도 선악과만은 먹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만은 못 먹게 막아주신 후, 자유의지의 사랑을 받든지 말든지,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요.

그러나 여호와의 침묵이며, 선악과를 먹고서 인간들이야 죽든지 말든지, 불행해지든지 말든지, 그 눔의 자유의지적인 사랑? 그대의 십팔번인 그것이 그리도 중요한 것입니까? 골백번 생각해봐도 선악과에 하와가 손을 대는 위기일발의 그 순간만큼은 침묵하지 말았어야 하셨건만 가령, 고함이라도 질러서, “안 돼! 비켜 서!”라고 막으셔야했건만! 여호와가 정말로 사람을 사랑하셨다면 말입니다.

하오나 에덴동산 그 후로, 심지어는 예수 십자가 그 후로도 여전히 비명들! 고통의 소리들! 세상은 온통 처참하게 방치돼 있건만, 그대는 오직 자유의지의 사랑을 위해서 주님은 어쩔 수가 없었다니깐!” 여전히 그 타령뿐인 잔인한 돌가슴들이여! 매정한 돌마음들이여! 무정하고도 헛똑똑의 종교나부랭이인 기독교여, 무지막지한 그대여!

 

홍수를 내가 땅에 일으켜 .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6:17)

 

기독교여. 사람 꼬시는 유혹꺼리에 불과한 그대의 천국론이며, 교인들을 붙잡아 앉히려는 공갈꺼리의 지옥 등등, 그러한 사후세계는 있지도 않건만 왜? ? 그대는 아직도 그 노래뿐입니까? 레파토리가 그것밖에 없습니까?

깊이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말이 좋아 에덴일 뿐, 사람들더러 살라는 건지 죽으라는 건지, 초대받지도 않았었던 그 뱀 말입니다. 그것이 하와를 꼬드겨 선악과로 유인을 했었으며 그녀는 드디어 그것을 땄고! 씹었고! 마침내 꿀떡! 게다가 아담에게 건네주기까지의 그 시간 내내, 여호와는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셨더란 말입니까.

사탄의 그 뱀이 온갖 짓을 다하고 있었던, 결코 짧을 수가 없었던, 그 긴긴 시간 내내! 뱀의 접근이며 하와를 거쳐 아담마저 선악과를 받아서, 씹어서, 꿀꺼덕! 그리하여 결국에는 사람에게 선악과는 씹혔고! 뱀에게 사람은 씹혔고! 그리되기까지의 그 통한의 오랜 동안 내내, 여호와는 뭔 용무가 그리도 급하셨기로 꿈쩍도 안하셨을까요?

! 어련하시겠습니까. 자유의지적인 사랑이 창조의도라느니, 그 때갈 좋은 그대의 정통교리 말입니다. 백번 양보하여 설령 그렇더라도, 늦었어도 너무 늦었었던 여호와의 늑장대응이 아니었습니까. 살짝만 일찍 오셨더라도 아담의 죄는 물론, 본문의 그 끔찍한 홍수도 막을 수가 있었건만 그리하여 사람들은 살고 사탄만 원통할 수 있었건만, 에덴동산에서의 그 위급하던 그때에 여호와는 어디에서, 과연 뭘 하고 계셨을까요?

보십시오. 커튼은 닫혔고 사건은 끝! 여호와가 약간만 서둘러주셨더라면! 선악과의 삼킴만큼은 막아주셨더라면! 아담과 하와는 물론, 그 후 세대의 인간들 역시 저주를 안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여호와와 뱀 사이의 어쩐지 찝찝한 그 무엇들 말입니다. 여호와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며?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있었던 위기의 그때에, 무언 그리도 급한 볼 일이 있으셨기로 딴청을 하셨던 것일까요?

다시금 전하거니와, 아담에게 선악과는 씹혔고, 뱀에게 사람은 씹혔고, 뱀 곧 사탄의 잔치는 이미 벌써 끝! 너무나도 늦게, 무지하게 늦게, 뒤늦게 나타나 고작 한다는 말씀마저,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아니, 그 말은 우리가 할 말이 아닙니까? “여호와여. 당신은 어디에 있다가 그제야 오셨습니까?”

얼마 전 발견됐다는 고대무덤 속의 목 없는 시신 한 구 말입니다. 전장에서 갓 돌아온 목 없는 그 시신을 붙들고 유족들은 분명히 엉엉 울었으리라. 단지 그뿐이었으리라. 땅 치며, 가슴 치며, 통곡인들 왜 안 했겠습니까마는, 그게 모조리 아담의 선악과 꿀꺼덕! 그 때문이 아닙니까.

게다가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천벌, 뱀에게는 저런 천벌! 그러나 실제의 원흉인 사탄 자체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채로, 마치 심판을 서둘러 끝내버린 듯 했었던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니겠는지요.

또다시 강조하거니와, 그대는 여호와를 예수보다 더 높은 아버지 신으로 믿고 있습디다마는, 여호와는 아버지커녕 하나님 자신도 아니요, 아니요, 주님의 옛 이름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여 여호와, 예수, 성신 등등, 심정적으로는 다신론이며 3신론에 빠져있으면서도, 마치 유일신관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자신마저 속이고 있는 그대의 그 삼위일체론은 주님께 대한 또 한 번의 사탄적인 배신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여. 창세기 123! 성경의 그 중대한 도입부분에서의 인간 창조도, 그 이상한 주님의 늑장대응도, 그것들은 오직 사탄포획이라는 인간구원 그 이전적인 목적이며, 진짜 창조의도아버지까닭에 그럴 수밖에 없었음이올시다. 성경의 모든 것이며 주님의 유일한 뜻으로써의 사탄을 지옥에!”라는 바로 그 목적 말입니다.

요컨대, 그 중대한 목적이야말로 성경책에 의해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며 또한 유일무이한 창조의도라 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내 아버지여!”라고 하면서 주님조차 순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성경을 기록케 하신 유일한 그 목적 곧 아버지에 의해 인류역사는 철저히 좌우되고 있음이 아니겠습니까.

암요. 아버지니 아들이니, 하나님에 관한 호칭들은 우리들의 피조질서와는 사뭇 다르고 말구요. 가령, 아버지만 있고 어머니 하나님은 없는 둥, 성경적 질서이며 인간의 3차원적인 한계성을 초월하는 그 신비의 질서 말입니다. 성경의 보이는 글자에만 집착할진데 결코 알 수가 없는 성경 특유의 무엇이 아니겠는지요. 그렇습니다. 영원불변의 그 목적 곧 하나님 자신이 세우셨기에 창조자이신 주님마저도 끝까지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지존의 그 무엇! 과연 아버지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맞습니다. 변개할 수 없는 영원불변의 한 목적이기에 아버지인 것이며, 그 영원한 뜻 곧 그 아버지에게 순종해야하고, 그 뜻에 대해 철저한 순종 곧 효도를 해야 하기에 아들인 것뿐입니다. 육적인 인식으로는 생경하게 드릴지언정, 성경의 그 영적질서를 모르기 때문에, 혹은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여했다고 해서, 신이 여럿이나 있는 줄로 착각을 하더니만 드디어 삼위일체라는 괴물교리가 탄생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여. 제발 깊이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아담의 선악과 삼킴을 막아주셨더라면, 사탄 외에 모두가 좋았을 텐데! 그러나 하나님 자신조차 거스를 수 없으셨던 그 진짜 이유 곧 아버지말입니다. 그대의 고정관념과는 어차피 충돌 할 수밖에 없는 진짜 아버지이며, 창조자의 유일무이한 창조의도곧 그 아버지까닭에 사람들의 선악과 유린을 방임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그 외로우신 진짜 하나님 말입니다.

 

목사님. 197511월 마지막 날! 교회도 아닌 성당 마당의 철제 탁자에 마주 앉아, 바야흐로 우리 둘만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지 뭡니까. “주례 선생님이요?” 까짓 꺼! 내가 주례 겸, 신랑 겸! 성경책이 없었기에 허름한 찬송가, 그 놈을 꼭 챙겨들고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의 심경이었다고나 할까요. 물론 양가 어르신 모두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해 있었기에 몹시 피폐해져 있었던 내 사랑 그녀의 21살 먹은 앳된 얼굴에서는요 보일 듯 말 듯, 눈물이 맺혀가고 있었고요.

아무튼 마침내 나 곧 주례 선생님께서 결혼식 개시를 알렸는데요, “! 이 찬송가 위에 손 얹어!” 무엇보다도 주례 선생님의 그 장쾌했었던 혼인선포 말입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 결혼합니다.” ! “하객이요?” 웬 똥개 한 마리가, 제 딴에는 별 이상한 것들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게 이상했는지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마저 사라지고 말았고요.

하오나 비록 안보였지만 성령 하나님만큼은 그날 거기에서, 그렇게 출발하던 우리 두 사람을 기꺼이 축복하고 계셨음은 혹여 아니셨을까요? 그럼요, 그럼요. 예나 지금이나 저와 제 아내는 그렇게 굳게 믿고 있고 말구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3:23)

기독교여. 참혹하기 그지없는 세상만사 모두 여호와의 그 지각 때문이 아닙니까. 보셨다시피 자기가 죽인 시체들 앞에서 독한 말을 마구 쏟아내던, 열 살이나 됐을까 싶은 IS의 꼬마 살인자 말입니다. “이슬람교를 안 믿는 사람은 다 죽일 거야!”

TV를 통해 그 모습을 보고 들으며, 너무나도 참혹한 심경이 되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확 쏟아집디다마는, 생각해보세요. 선악과가 하와를 거쳐 마침내 아담에게까지 건네지고 말았으며, 그가 선악과를 입에 넣어 와자작씹고 있었고, 이제 막 그 놈을 삼키려던 바로 그때! 정녕코 그때에라도! “여호와는 다 아신다며?” 그러므로 아담의 선악과 꿀꺼덕그 후에 인간들이 겪게 될 처참한 미래를 당연히 예견하셨을 텐데 왜? ? 여호와는 끝끝내 침묵만! 침묵뿐! 대체 왜 그러셨을까요?

능히 예상하실 수 있었을 차후 사태의 그 비참함을 미리 아셔서, “안 돼! 뱉어! 삼키면 큰 일 나!” 여호와께서 그래만 주셨더라도, 지금의 이 참혹한 살인들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으련만, 아담까지 마침내 아내에게 선악과를 받아서, 씹어서, 꿀떡! 그리되기까지 여호와는 대관절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셨을까요?

여호와의 그 때늦은 질문 말입니다. 물론 그래서 주님은 더욱 인격적이라느니, 좋은 말만 골라하는 그대이지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 있긴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저주를 받았건만 그 무슨 뜬금없는 질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전지하다고 강폼을 잡고 계셨던 여호와가 아닙니까. 하여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다면 그와 그의 후손 모조리 저주받을 것을 아셨을 텐데, 기껏 한다는 질문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대여. 제발 고정관념을 잠시만 접고서 아주 조금, 조금만이라도 생각해주실 수는 도무지 없겠는지요. 가령, 아담의 불순종을 뻔히 보면서도 도무지 어찌할 수 없으셨다랄찌, 여태껏 재림을 못하신다랄찌, 주님 나름의 그 안타까운 까닭이며, 에덴동산에서도 절대로 개입할 수 없었던 오직 주님만의 그 큰 슬픔의 이유 말입니다. ! 홍수심판을 야기했건만 여전히 끝없이 번져가고 있는 인간 타락의 그 처참한 근본원인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동산에서도, 지금까지도 주님은 침묵만! 침묵뿐! ? ? 그대의 짐작보다 훨씬 깊은 주님만의 그 속 깊은 비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의 나체로서 당신의 치부를 폭로하면서까지, 우리에게 꼭 말씀하고 싶으신 바로 그 이유 말입니다. 그렇고 말구요. 오직 예수 이름의 완성을 위해 곧 사탄 없고 배신 없는 영원평화를 위해 에덴동산에서도, 십자가에서도, 또한 지금까지도, 침묵만! 침묵뿐! 그 모두가 실은 그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보고픈 기독교여. 때마침 향긋한 내음으로, 반가이 내 방 창문을 노크하고 있는 매화꽃들의 그 해맑은 미소 말입니다. 하얗고! 뽀얗고! 어여쁜 수줍음이랄지, 애기처럼의 환한 미소들 말입니다.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혹여 그대도 나를 반겨줄까 싶어 한껏 용기를 내어 그대의 창문을 또 두드리오니, 하나님의 그 이상한 늑장대응? 당연히 의도된 책략이었거니와, 자기를 꼭 닮은 인간을 지으셨음도, 뱀의 하와에로의 접근을 방치하셨음도, 아담의 선악과 삼킴을 방치하셨음도, 암요. 창조자만의, 창조자다우심의 그 놀라운 책략이셨노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끝끝내 인간구원만을 위한 구속사라는 둥, 종교냄새 지겨운 그대의 그 정통교리 말입니다. 매우 늦었지만 아주 늦기 전, 거기에서 탈출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지요. 암요. 창조자의 의중은 오직 무한자유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 곧 자유를 위한 지혜의 실존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음이올시다. 그러나 그대는 영적우상인 정통교리에 꽁꽁 묶인 채로 바보가 되었지 않습니까. 대체 언제까지나 천지분간도 못 하는 그 천한 종교질이며, 예수 이름에 대한 그 못된 역적질을 계속하겠다는 말입니까.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내가 그

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6:6~7)

기독교여. 꼴불견이 따로 없을 정도인 그대의 민낯이 아닙니까. 거룩한 척은 혼자 다하고 있지만, 그 징그러운 가면들 뒤에 숨겨져 있는 그대의 쌩얼 말입니다. 그러한 그대가 본문의 그 심각성을 알고나 있겠는지요.

보십시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음이 결코 아니라, 사탄 곧 바벨탑의 오만과 바리새인의 교만이며 그대의 정통교리와 격전을 치름으로써 주님의 한을 꼭 풀어달라고, 마귀가 왕으로 있는 세상에로 파송됐었던 최초의 선교사 아담과 하와 말입니다.

물론 성경의 겉 글자들만으로는 쫓겨났음이 분명하지만 본문 가라사대, 한탄? 또 한탄? 여호와의 전지성이 의심이 될 수밖에 없는 본문이 아닙니까. 따라서 보이는 성경책의 표피적인 무엇이 전부일까하는 의문이 당연히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의심마귀? 그 경박한 종교 짓거리는 제발 멈추고 말입니다.

그리하면 아시리니, 성경책 속의 안 보이는 성경 곧 참 아버지이시며 주님의 영원한 유일 목적인 그 창조의도 말입니다. 철저히 감춰져있었기에 사탄은 낌새조차 챌 수가 없었거니와, 악마는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을 이겼노라 곧 하나님을 이겼노라 쾌재를 불렀겠지만, 사건의 전모는 다만 창조자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는 그 패배자 마귀의 비극이 아닙니까. 오히려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던 아담과 하와야말로 영원승리를 위한 주님의 장쾌한 군사들이었음을, 그대여. 부디 깨달을 수 있게 되기만을 간절히 바랍니다.

 

목사님. 둘만의 결혼식! 나 홀로 주례! 거기까지는 낭만적일 수도 있었지만 이거야 원! 다니던 직장에서 짤리지를 않나, 사람 사는 게 어째서 요 모양일까 싶었고요, 물론 굳세어라 금순아이었던 제 아내는 낙심하고 있는 저를 격려해 줬지만, 마침내 시작되고 있었던 그 지겨운 연단 말입니다. 째지게 가난했고요, 툭하면 굶기가 일수였고요.

그런데 형님. 그 험한 판국에, 제가 신학교엘 다 합격했지 뭡니까. 그러나 문제는 역시 돈! 입학금을 위해 제 선친을 찾아갔습니다마는, 돈 얘기를 꺼내자마자, “네 아버지는 따로 있다며! 네 아버지한테나 가봐.”

한때는 그 유명한 모모 장로교회의 안수집사이셨던 선친께서 어떻게 그리도 심한 얘기를!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릅니다. 하기는 이제 와 생각해본즉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깨닫고 감사 또 감사뿐! “진짜 아버지이신 성령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독교여. 더럽게 진화된 이 세상의 흉측한 몰골에 대해 어찌들 생각하십니까. 그대들끼리 뒤엉켜 개싸움을 벌리는 사이에 세상은 멀리, 아주 멀리, 그대의 훈육이나 충고 따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별난 세계로 영영 달아나고 말지를 않았습니까. 불이익을 당할지언정 교회됨의 품위만은 지켜달라던 주님이시건만, 판검사들도 그대의 문제라면 넌덜머리를 낼만큼 그대는 이미 양아치 못지않은 쌈꾼이 되었고요.

그러기에 개독교? 차라리 그 정도는 그대에 대한 애칭임을 알고나 계십니까? 그럼요. 그대는 개독교답게시리, 돈 쓰고 빽 쓰고, 별 짖을 다해서라도 총회장 감투, 그거 하나 뒤집어쓰고자 눈부시게 성장이 되었고요. 주님은 그대의 괄목할만한 성장 탓에 또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시려는지, 실로 기똥찬 그대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정통교리 수호? 참 잘 빠지셨습니다. 게다가 성경필사? 그건 해서 뭘 하게요? 불교 등은 자기네의 경전필사를 평생의 명예로 삼고 있지만, 성경이 어디 팔만대장경이랍디까? 하기는 그대 또한 종교이므로 그 너절한 종교행태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어야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예수 죽인 성경의 전문필사꾼들이었던 서기관들 말입니다. 그대 또한 그들처럼 성경책을 베껴서, 책으로 만들어서, 흐뭇해하고 있사오나, 눈을 좀 부릅뜨고서 성경책을 다시금 똑똑히 읽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 엄중한 십계명을 말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라고 분명히 여호와께서 친히 명령하셨건만, 신속히 뒤집으시기를, “죽여라! 모조리 죽여!”라고 즉시 번복해버린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니었습니까. 물론 가나안 7족속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우상숭배에 선민들마저 물들겠기에 그들을 모조리 죽여라?” 그쯤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때의 원념으로 말미암아 아말렉 족속에게 한을 품으셨고 그 원한을 끝내는 살인이요 학살로서 한풀이를 명하셨던 여호와가 아닙니까. “살인하지 말라라고 명령하셨건만, 말씀 달랐고 행동 달랐고, 자기모순에 빠져 있었던 그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청하오니 기독교여. 이 촌놈을 무조건 이단이라고 욕보이기보다는, 쿨한 지성으로서 성경을 다시금 살펴볼 수는 도무지 없겠는지요.

가령, 뒤끝이 많아도 너무 많으셨다랄찌, 사랑이니 자비니 말만의 선언적 구호에 불과했을 뿐! 아시다시피, 아각 따위에 대한 살기이며 선민과 이방인 사이의 극심한 차별성 등등, 여호와의 사랑이란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집착에 불과했을 따름! 과연 그 이름 여호와에게 사랑이 있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결코 영원하지 못할 자기의 옛 이름 여호와를 성경책을 통해 아프게 소개하고 계시거니와, 여호와가 아버지는 무슨!! 반드시 지워질 운명의 하나님의 옛 이름이었노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특혜를 베풀었지만 여호와의 수고는 늘 거품으로 끝났으며, 그 이름의 기대와는 달리 선민들조차 우상숭배에 빠지곤 하지 않았습니까. 끝내는 여호와의 배신자들이 되었고 마침내 여호와의 분노 까닭에, 그 이름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선민들의 남북왕국 모조리 멸망해 버렸음! 여호와의 수고는 말짱 헛수고였었음! 말라기서를 끝으로 쓸쓸히 사라져야 했었던 비운의 그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요컨대, 여호와는 아버지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도 부당하므로, 드디어 폐기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의 모순성을 성경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계시고요, 차라리 성경은,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커밍아웃이며, 주님의 상처자체 곧 당신의 옛 이름 여호와에 관한 자기고발장이요 자기폭로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그 이름 곧 그 말씀의 성육신과 동시에 거명조차 안 되고 있는 여호와가 아닙니까. 구약성경 내내 그토록 굉장한 실체였건만 마치 호적을 파버린 듯, 신약성경은 그 이름의 흔적마저 지워지고 말았으며, “누구는 죽여라대신에 모두를 사랑하라로서, 여호와와는 철저히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그 이름 예수 말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부활 후에 기록케 하셨던 마태복음 첫 절에서부터 계시록의 끝에서까지 여호와라는 이름은 발견조차 안 되고 있지를 않습니까. 또 강조하거니와, 여호와니 예수니, 따로따로의 두 하나님이 절대로 아니고 말구요. 하나님은 이제와 영원히 오직 한 분뿐이라는 성경의 이 진리야말로 참된 천국의 영원한 생기인 것입니다.

하기는 그대, “이 무식한 촌놈아, 너는 이단이야!”이겠지만, ! 욕하면 받으리라. 때리면 맞으리라. 그러나 같은 하나님이시건만 예수와 여호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여호와는 원수를 죽여라? 죽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생사람을 잡을 수는 없고 절간에 몰래 들어가서 불을 살짝 질러준다거나, 그대도 가끔씩 선민행세를 합디다마는, 원수를 사랑하라? 죽여라? 대체 어쩌라는 건데? 무슬림들의 공격을 받을 때에 우리도 총칼을 들고 죽여? 말어? 암요. 성경책은 받들어 봉독하고, 베껴 쓰고, 암송하고, 그 따위를 위한 종교경전이 아니고 말구요.

 

예수께서 ....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2:1)

기독교여. 하나님이신 아기 예수를 제일 처음 뵙는 그 큰 광영을 입었었던 소위 동방박사들 말입니다. 여호와 식으로 말하자면 당장에 때려죽여야 마땅했었고, 여호와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던 더러운 것들이 아니었습니까. 말이 좋아 박사일 뿐, 별을 보며 점을 치던 점쟁이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여호와에게 도발이라도 하는 듯, 여호와의 원수일 수밖에 없는 점쟁이들의 경배를 받으며 그렇게 태어나신 예수가 아니셨습니까. 한분 하나님의 두 이름이건만, 예수와 여호와는 어쩌면 그리도 달랐더란 말입니까.

그대여. 성경을 통해 영생의 길을 찾고 있다는 그대이지만, 과연 정신을 가다듬고서 순수하며 진지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고 있는지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의 도무지 좁혀질 수 없는 큰 간극이며, 달라도 너무 다른 그 큰 차별성을 말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아들을 얻고자 처절한 몸짓조차 마다치를 않았었던 아브라함이며 사라 등등, 자식의 수북한 생산을 큰 복으로 간주했을 정도로, 구약성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낳고 죽고이건만, 그 이름 예수만의 낳으시고 죽으시고그 이후의 신약성경에서는 대체 왜? ? 구약성경이 그렇게나 중시했었던 낳고 죽고이며 자녀의 생산이 거의나 홀대 내지는 아예 무시를 당하고 있더란 말입니까.

깊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성육신 못지않은 주님 자신의 문화적인 강림인 구약성경 말입니다. 신약성경과는 확연히 구분이 되리만치, ‘낳고 죽고의 가득함이며, 역한 피 비린내가 진동하지를 않습니까. 그대의 정통교리에 따르면, 여호와가 사랑과 자비자체라고는 하지만, 보세요. 사랑은 무슨!! 구약성경 하나 가득, ‘죽임 충만, 죽음 충만!’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은, 구약성경은, 여호와 이름의 부끄럽고도 적나라한 자기 프로필이므로!

 

목사님. 저 같은 자가 신학생이 되었으니 얼마나 꼴값을 떨었겠는지 짐작이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눔의 방언 말입니다. 방언기도 소리를 들으면 어처구니없게도 열등감마저 들었고요, 결국에는 참말로 멍청하게도, 40일 금식을 해서라도 방언은사를 꼭 받아야지!” 독한 맘을 먹고 북한산 꼭대기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5일째 쯤 되었을까요. 그날도 역시 철야기도를 하며 펑퍼짐한 바위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주여! 방언 주세요. 방언!” 그러고 있었는데요, “아이고 야!” 하늘이 또 열렸지 뭡니까. 넙데데한 바위 위의 내 머리에서부터 끝도 없이 높이 높이, 신비하고도 찬란한 빛의 길이 열렸었지 뭡니까.

얼마나 황홀하던지 그 빛의 길말입니다. “좋았겠다고요?” 물론 첨에는 그랬지요. 그런데 이거야 원! 징그럽고도 너무너무 끔찍했던 것은요, 그 길 좌우편에 뱀이며 지네며 온갖 흉악한 것들이 꿈틀거리면서 그 빛의 길을 뚫으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황홀하던 방금 전의 기분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고요.

형님. 장래에 대한 예시적인 무엇인 것 같기는 했지만 그때의 그 찝찝하던 기분 말입니다. 게다가 그 빛의 길은 어쩌면 그리도 좁았는지요. “내 힘으로는 저 빛의 길에 들어서는 것조차 절대로 쉽지가 않겠구나!” 김이 팍 샜었던 그때의 그런 느낌?

 

하와가 잉태하여 카인을 낳고 . 내가 여호

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기독교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오해를 받을지언정, 자식의 생산은 육체를 지닌 인간들만의 특권이 아닙니까. 천사나 사탄이나, 몸 없는 영들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자손의 증식인 것이며, 에덴동산에서는 상상도 못했었던 잉태와 해산 곧 여호와의 자손임에 손색이 없었던 카인의 탄생 말입니다.

어떤 이들의 망발처럼 여호와가 하와를 겁탈했음이 아니라, 하와가 카인을 낳았을 바로 그때! 분명코 사탄은 통탄을 했으리라! 영체인 사탄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인간만의 권세인 자녀의 잉태와 해산이었음으로! 그러기에, “여호와로 말미암은 득남?” 이 얼마나 통쾌한 승전보인 것입니까. 물론 하와는 카인해산에 관한 그 엄청난 신비에 관해 모르고 있었을 개연성이 크지만, “여호와로 말미암은 득남이라!” 주님의 성경적인 쾌재가 분명하고 말구요. 우주역사 최초의 창조적인 낭보였음으로!

다만 몹시 궁금한 것은, 잉태와 해산은 하와에게 내리신 주님의 심판이었다고 성경은 적고 있지만 정녕 그뿐이었을까요? 심판이라는 것이 왜 꼭 해산의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며? 그러니 당장에 죽이지는 못할지언정,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린다거나 선악과를 땄었던 손모가지를 잘라버린다거나 그럴 수도 있었으련만, 죄에 대한 심판이 왜 꼭 사람하와를 통한 사람카인의 해산이었을까요? 하기는 카인 까닭에 그녀가 받았을 맘고생은 사망을 지나는 큰 고통이었겠지만, 한편 사라니 리브가니 저들의 아들생산은 마치 하나님의 축복인 듯 성경은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인간을 통한 주님의 역작인 그 카인 말입니다. 그를 위해 에덴이라는 허명의 동산을 창설하셨거니와, 뱀 곧 사탄의 수작질을 방임하셨던 천재 지략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방임과 이해할 수 없는 늑장대응 등등! 그 어찌 주님만의 고도의 전략이 아니었으리요. 사탄을 포획키 위한 그 놀라운 창조적인 전술전략 말입니다.

요컨대, 성경은, 성경은, 불경처럼의 종교경전이 아니라 사탄을 천벌하기 위한 주님의 문화적인 강림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글자의 옹색한 형용으로 나타셨지만 성육신 못지않은 하나님다움의 그 강림 곧 성경이었음을 부디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그대가 기독교의 그 냄새나는 종교의 누더기를 아주 조금일지언정 싫어하기라도 한다면, 교회됨의 자유와 영광을 그리워하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추겠건만, 여호와의 또 다른 그 무책임성(?) 말입니다. 카인과 엮여진 또 한 번의 안타까움이며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여호와의 처신이 아니겠습니까.

카인을 낳고 하와 가로되,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 웬 막말? “여호와가 자기에게 뭘 어쨌다고?” 여호와로 말미암은 득남이라니요? 여호와를 쏙 빼닮은 카인이라는 뜻입니다마는, 암요. 하와의 영성은 우리보다야 훨씬 뛰어나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불순종의 죄는 지었지만 영성을 더럽힐만한 속된 문물이 전혀 없었던 때이오니, 하와의 영성은 온갖 추잡한 것에 쩔어있는 지금의 우리들보다 월등히 뛰어났겠고, 자기잉태의 비밀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으리라. 요즘의 여인들도 태몽 등을 통해 자기 아이의 어떠함을 아는 것처럼, 아담의 정이 자신의 자궁에 착상은 됐지만 그 모두가 여호와의 뜻이었음을 만일 몰랐다면 하와는 뇌 없는 바보가 아니었겠습니까.

맞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은 득남이라! 놀랍고도 어마어마했었던 인류 최초의 그 해산을 위해, 뱀의 하와 접근을 방임 내지는 조장을 하셨다랄지, 지각쟁이 주님이랄지, 그 모두는 하와의 카인해산이라는 그 대업의 성취를 위한 특별한 섭리였었더라! 그렇고 말구요. 오직 사탄 놈을, 그 더러운 악마를 반드시 지옥에 처넣기!’ 그 영원승리의 초석을 위한, ‘여호와로 말미암은 득남!’ 바로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카인의 그 비참 말입니다. ‘여호와가 동생만 예뻐하셨다?’ 감정이 상하는 것은 당연지사올시다. 하기는 성경에 따르면, “아벨이 형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음으로 여호와가 아벨을 더 사랑했다.”이지만 그러니 더욱 이상한 여호와가 아닙니까. 여호와는 사랑이라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못난 카인을 잘난 아벨보다 좀 더 챙겨줬어야만 그런 게 사랑이 아닙니까? 사람 부모조차 못난 자녀를 위해 그러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오나 여호와는 사랑의 기본조차 없었으며, “너는 죄를 다스리라?” 이 얼마나 혹독한 지도편달이며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아닙니까. 카인의 상한 심정을 더욱 긁어놓는 듯 했었던 여호와의 그 싸늘한 훈계 말입니다. 왜 좀 따뜻함이 없었을까요. 만일 여호와가 자신의 공언처럼 선한 목자였다면, 아벨보다는 당연히 토라진 카인을 보듬어줘야 했을 텐데, 그쯤은 사랑의 기본인데, 여호와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게다가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뇨?” 그 무슨 섭한 말입니까. 그의 분노는 여호와의 편애 탓이었건만, 끝끝내 카인의 감정을 더욱 찢어놓는 질책 뿐! 훈육뿐! 선한 목자다움의 한마디의 위로도 없었더라. 하여 카인의 살기? 그게 대체 누구의 탓입니까?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

께서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4:8,9)

기독교여. 본문의 말씀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의 복사판이 아닙니까.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는 또 한 번의 여호와의 그 지각출현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시의 사람들의 숫자가 천 명이었습니까, 만 명이었습니까? 목자로서 돌봐야할 양들이라고 해봤자 달랑 4(?)뿐이었건만, 그 치명적인 현장에 개입하지도 않은 채로, 여호와는 정녕 어디에서? 대체 무얼 하고 계셨더란 말입니까.

보십시오. 카인이 아벨과 옥신각신하던 그때에라도, 최소한도 그가 동생을 죽이려던 바로 그때에라도, “죽이지 마! 죽이면 너 저주 받아!” 그 한 말씀만큼은 급히 하셔야만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사랑의 기본 중에도 기본이니 말입니다. 만일 그래만 주셨더라면, 악한의 대부로 불리는 그 카인이 왜 살인을 멈추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아시다시피, 선한 목자라 공언했었던 그 여호와의 기초적인 사랑의 배려는 끝내 없었더라. 마침내 살인은 저질러지고 말았고, 카인은 저주를 받고 말았고, 여호와는 또 지각 또 뒷북! 뒤늦게 나타나 고작 하신다는 말씀이, “카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대여. 여호와의 상습적인 지각출동이며, 늦어도 보통 늦은 게 아니었었던 또 다른 늑장대응 말입니다. ! “여호와는 전지전능하다며?” 게다가 인구라고 해봤자 겨우 4명뿐이었기에 그러니 할 일도 별로 없었던 한가한 때였기에 하려고만 드셨다면 그 참혹한 살인은 쉽게 막으실 수 있었건만 여호와는, 여호와는, 그 끔찍했었던 그때에, 대체 어디에서? 뭔 일이 그리도 바쁘셨을까요? 혹시 싸움구경처럼 재미있는 일이 없다더니, 인간 최초의 그 싸움구경을 은근히 즐기고 계셨음은 아니었을지.

물론 그저 웃자는 헛소리입니다마는, 참으로 이상한 여호와의 그러한 행각들을 수도 없이 읽었으면서도 그대는, 기독교는, 아무런 갸우뚱도 없이 생각스톱, 성장 멈춤! 어째서 그토록 바보가 되었더란 말입니까.

그대여. 포악한 기운이 세상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으며, 음탕의 광기가 천하를 뒤엎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성경책 속의 숨겨진 진리요 감춰진 그 진실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야하지 않겠는지요. 대관절 언제까지나 창기노릇을 하렵니까. 여호와를 아버지로 믿는 그 종교질이야말로 영적인 간음임을 왜 모르는 것입니까.

카인의 스토커 여호와 말입니다. 죄를 지었은즉 천벌로서 그를 응징해야 했건만, 이상하게도 보호의 표식까지 주지 않았습니까. ? ? 살인자 카인은 여호와 자기의 국화빵이었음으로. 카인해산 후, 하와의 그 첫 성 말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 이 얼마나 굉장한 인간최초의 신앙고백이었더란 말입니까.

다만 우려가 되는 것은, 그대의 정통교리에 따르면 카인의 탄생은 여호와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음으로, 하와의 그 말은 혹시나 망발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와의 정신상태가 헛소리나 할 만큼 엉망이었다면, 그래서 헛소리를 떠버린 것이라면, 그 중대한 성경의 초입에 그 같은 헛소리를 끼어놔야 했었던 성경의 원저자 성령님마저도 헛소리를 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하와의 말에 관해서는 생각조차 안하는 그대이지만, 여호와 그 이름의 그 아들 카인! 그는 정녕 사탄을 포획코자 마련하셨던 성령님의 전략적 포석의 인물이었으며, 그 카인은 진정 주님의 특별한 종이었었노라 하는 것입니다.

암요. 성경의 한 목적적 향방은 오직 사탄을, 오로지 사탄을 주님의 안식으로부터 영구히 추방코자함에 있고 말구요. 인간구원 역시도, 구원하신 그대를 군사로 쓰셔서 사탄을 지옥에 쳐 넣고자 하셨던 그 한 목적의 일환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구원이 우선이 아니라 성경은, 성경은, 하나님을 위한 절실한 그 무엇인 아니겠는지요.

 

기독교여. 가상칠언에서도 매우 이상한 그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신비한 말씀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 그대는, “버림받아 마땅한 인간의 죄 때문에 우리 대신 비명을 지르셨어!”입니다마는, 그러나 여호와와 사탄의 관계 곧 여호와의 상징인 다윗과 사탄의 모형인 압살롬과의 그 묘한 관계성 말입니다.

! 압살롬의 죽음에서,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 대신 죽었더라면?” 좀 심했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하기사 그대는 부성애라느니, 멋진 말로써 다윗의 처사를 미화합디다마는, 정작 맏아들 암논의 죽음에서는 의례적인 슬픔 외에 그 이상이 없었건만, 패역부도의 압살롬! 그가 대체 누구이기에, 압살롬의 죽음사건에서 마치 오버하는 듯 했었던, 다윗의 그 이상한 통곡이 아니겠는지요.

그렇지 아습니까? 하나님의 상징인 다윗의 납득하기 어려운 그 비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사탄과 얽혀있는 그 이름 여호와 까닭에 비록 하나님이시라도 사탄을 지옥에 보내는 것은 절대로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승리 이후인 지금까지도 악마를 포박하기는커녕 알다시피, 사탄이 영계에서 활개 치도록 방치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 ? 영적전쟁은 정녕 합리성의 싸움이므로!

그러기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탄을 포박할 합리성이 주님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며, 사탄을 당장에 지옥에 처넣지도 못하신 채로 그 악마의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찍 소리조차 못하는 주님은 혹시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많은 성경의 모순들이랄지, 본문의 그 이름 여호와와 살인자 카인! 그 둘 사이에 엮여 있는 그 이상한 일들은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목사님. 신학생이 됐다고는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별 것도 아니더라고요. 다만 웃기는 것은요, 교내 전체 채플의 설교를 저에게 하라는 거예요, 글쎄! 구역장은커녕 주일학교 교사도 해본 적이 없는 왕초보에게 장난도 아니고 진짜로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한 쫌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쩝니까. 하겠다고 그랬지요, ! 난생 처음 해보는 설교였기에, 근사한 말로만 노트에 빼곡히 써놓았고 외우고 또 외우고!

그러나 막상 단상에 앉아있던 바로 그때, 눈앞이 캄캄해지지 뭡니까. 뭘 준비했는지, 어떻게 설교해야할지, 생각이 전혀 안 나는 거예요, 글쎄! “! 개망신은 뻔하고, 신학교는 부끄러워 더는 못 다니게 되겠고, 지금 토껴버려?”

바로 그 찰나, 사회를 보던 자매님이, “설교하실 전도사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합심기도 후 돌연 눈이 환해지더니만 아니 글쎄, 그토록 무섭게 보였던 수많은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겁나기는커녕 살짝 쉬워 보였고요, 준비했던 설교가 아니라 웬 엉뚱한 말들이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술술 잘도 나오지 뭡니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

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24)

기독교여. 부모를 떠나라는 본문의 최초 순종자(?) 카인 말입니다. 살인자가 되었고, 부모를 떠나 에덴의 동편 놋 땅으로 도망쳐야했었던 카인이 아닙니까. 하오나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살인자였건만, 표까지 주시며 그를 지켜주셨던 여호와 말입니다. 그럴 것이면 차라리, 보다 일찍 임하셔서 그 무서운 살인을 막아주실 수도 있었건만,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상습 지각장이 여호와가 아닙니까.

? ? 아담과 하와를 부부되게 하셨음도, 뱀의 미혹을 조장하셨음도, 그 통한의 늑장출동들까지! 선한 목자? 목자의 기본도 없이 선악과를 먹도록 방치하시더니만, 살인자가 되도록 방임하시더니만, 그러니 주님의 직무유기? 절대로 아니었고 말구요. 오직 그대와 사탄이 낌새도 못 챌 만큼 실로 대단하셨음! 여호와 이름을 자신으로부터 영구히 제명키 위한 하나님의 그 신비한 전략 말입니다. 지금도 그 작전은 계속되고 있고요.

물론 그대는, “이 무식한 촌놈아. 너 이단 맞지?” ! 그대가 끝끝내 그 잘빠진 정통교리에 목을 맨다면,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안타까울찐저,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며? 그대의 열매인 목불인견의 모습들하며, 모두가 돈에 환장해 버렸다는 그 슬픈 진실하며, 그대를 꼭 닮은 그대의 열매 곧 조국의 사람들 말입니다.

마구 칼질을 한다거나, 성폭력의 달인들이 됐다거나, 그대의 열매인 조국의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대는 인간만을 위한 예수 십자가라느니, 죽은 후에만 간다는 천국이라느니, 주님도 못 말리는 그대의 정통교리이며 그 똥배짱 말입니다. 주님께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채로, 인간만을 위한 극도의 이기심으로 가득한 그대의 그 기똥찬 정통교리가 아니겠는지요.

묻사오니, 그대의 마음에 주님을 위한 작은 공간이라도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보세요. 보이지는 않지만, 들리지도 않지만, 보이는 성경책 속의 안 보이는 주님의 그 처절한 아프심과 외로움에 관해 조금치의 생각인들 해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대만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참된 교회가 되어 순백의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상처를 치유해 드릴 수 있건만, 주님의 그 고독해하심을 달래드릴 수 있는 실존은 그대뿐이건만, 돌마음의 그대여! 주님의 그 처참한 외로움일랑은 아랑곳도 않는 가운데, 늘 자기밖에 모르는 잔인한 이름이여! 종교 따위로 전락한 매정한 기독교여!

간청하오니, 그 누추한 종교의 시대를 신속히 끝내주소서. 제발 진짜 교회가 되어주소서. 참된 교회이며 주님의 아내가 되어, 예수 이름 곧 자유의 생명인 참 믿음과 참 사랑만으로 치유해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그 큰 상처 말입니다.

그러나 걸핏하면 아멘? 툭하면 할렐루야? 숫자 불리기에만 눈이 뒤집혀 있는 그대에게 과연 주님의 그 처절한 고독이 믿어지기나 할는지! 부디 눈만 말고 마음을 열어 성경책을 다시금 살펴볼 수는 도저히 없겠는지요. 그리하면 아시리니, 살인자 카인을 마땅히 처벌해야 했건만, 그대에 의해 패륜아라고 낙인이 찍혀버린 살인자 카인에게 보호의 표를 주면서까지(4:15), 그의 뒷배가 되어주셨던 그 여호와를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카인은 홍수심판꺼리인 세속문화의 선조올시다. 최초의 살인자였지만 여호와의 별난 보호를 받았었던 그 카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후손들을 여호와는 홍수로 몽땅 싹? 여호와는 다 아신다며? 하여 지금 보호해 주시는 그 카인의 후손들이 장차 타락할 것을 미리 아셨을 텐데도, 카인을 특별히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홍수꺼리의 후손들을 왜? ? 수북이 번성케 하셨을까요?

그대여. 마치 인간들이 그럴 줄을 몰랐다는 것처럼 인간창조를 한탄하던 그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물론 그대에 의하면, 여호와가 그토록 중시하는 자유의지이므로, 저들의 죄가 심판꺼리에 이르기까지 방임할 수밖에 없었고, 순전히 저들의 죄 때문에 공의의 홍수심판으로서 모조리 죽여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그대의 폼 나는 정통교리입니다마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인들도 모조리 죽여버렸거니와, ? ? 여호와는 사람 죽임을, 살인을, 그토록 잔인함을 서슴없이 자행하곤 하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자신은 살인의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여호와의 십계명에서는 매우 모순되게도, “살인하지 말라?” 혹시 사람 한 둘을 죽이면 살인이고 왕창 죽이면 여호와의 공의로운 심판? 하기는 죄에 대한 여호와의 고유 심판권을 어찌 감히 부인을 하겠는지요. 다만 형평성의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마땅히 죽여야 했었던, 그것도 최초의 살인자요 그 큰 죄인 카인은 살려두셨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보호마저(4:15) 해주셨지 않습니까. 그대여. 이상하지도 않습니까. 어찌하여 그대의 영적인 성장이 뚝 끊기고 말았다는 말입니까. 제발 자라나소서! 신속히 떠나소서! 기독교의 영적우상인 그대의 그 천박한 정통교리로부터.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

리 걸식하며 . 빌어먹게 하소서.(109:8,10)

 

기독교여. 본문의 이 끔찍한 저주 말입니다. “! 그거! 가룟 유다에 대한 예언이잖아!” 만일 생각이 그뿐이라면, 그대는 성경의 기본도 모르는 왕초보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직접,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5:39)”라고 말씀하셨거니와, 모든 성경은 주님 자신에 관한 무엇으로서, 본문 역시 치유되지 못한 주님의 옛 본질이며, 하나님의 옛 이름 곧 그 이름 여호와의 참혹한 본색이 본문으로 계시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서 보듯, 사탄에 대한 극도의 분노 자체인 그 이름 여호와를 성육신보다 훨씬 전, 구약성경이라는 문화적인 강림으로써 드러내야만 하셨더라. 요컨대, 그대가 아버지라 믿고 있는 그 여호와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옛 이름일 뿐이며, 사탄에 대한 분노의 속성 곧 하나님의 병리적 이름이 바로 여호와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보이는 성경만으로는 여호와에 관한 그대의 오해가 입증되고도 남지만, 그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깊이 성경을 묵상해본다면, 정통교리 너머의 진실이 그대의 영혼에 분명히 비춰올 터! 본문으로 폭로되고 있는 참 하나님의 그 참혹한 신비가 말입니다. 아담의 타락과 카인의 살인에 얽혀있는 그 비밀인 것이며,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의 그 본성 말입니다. 그것은 대체 누구의 형상인 것입니까?

마귀? 마귀는 비록 큰 능력의 영이지만, 창조와는 무관한 피조물일 뿐이기에 아담의 본성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던 하와의 본질도, 존속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카인의 그 성질머리도, 창조능력이 있을 수가 없는 피조물 사탄의 작품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인간을 그리되도록 지으신 분은 창조자 하나님 외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 중에도 기본이 아니겠는지요. 오직 하나님만 창조자이시므로!

맞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카인! 저들의 본질 곧 그 영혼은 마귀가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만의 옛 이름 여호와올시다. 본문의 분노 자체요 그 이름 여호와의 병적인 질서를 따라 살 수밖에 없도록 인간은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분노의 그 이름 곧 여호와 자신인 그 생기를 왜? ? 인간에게 입혔던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신학교 졸업 후 그 지겨운 실업자가 또 될 줄이야! 물론 첨에는 오라는 교회가 몇 군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해본다고 망설이다가 그만 기회를 놓쳐버렸지 뭡니까. 아내에게 미안했고 엄청 쪽팔리기도 했고요. 그러니 어쩝니까. 명절이면 사람의 눈을 피해 산으로 도망치곤 했었습니다. 더운 날에도 늘 마스크를 쓰고 다녔고요.

왜 그랬냐고요?” 혹시 누가, “어이, 자네 요즘 어떻게 지내?”를 물어볼까봐 되게 두려웠더랍니다. 그런데 형님. 원 세상에, 세상에! 기도를 한답시고 이산 저산,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그만 노숙자가 됐지 뭡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이면 밤마다 폭발하는 듯 했었던 기도의 그 통렬함 말입니다. 노숙자 주제에 지 까짓게 그 무슨 대단한 애국자라도 된 듯, 국가의 앞날이 왜 그리 통탄스럽던지, 밤을 새우는 것은 보통이었지 뭡니까.

그러던 어느 날, 제 입에서 희한한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글쎄! 그렇게도 기다리던 방언이 말입니다. 아름답고도 찬란한 방울들이 몽골몽골 하늘을 향해 무수히 솟아오르고 있었고, 금식이니 철야니 별 짖을 다하며 그토록 간구한지 5년 만에, 그것도 노숙자 신세의 그 비참한 처지에야 비로소 주님이 방언은사를 주셨지 뭡니까. 그러나 원망은 무슨!! 천하를 얻은 것처럼 무지 행복했었더라. “성령님! 고맙습니다. 너무너무 땡큐!”

 

기독교여. 하나님의 창조권능이 아니고는 결단코 허물 수가 없는 그대의 정통교리이며 그 철벽 말입니다. 내 머리로라도 그대의 그 철옹성에 부딪혀 장렬하니 전사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영광이리라.

다만 몹시 궁금한 것은 왜? ? 그대는 성경을 꼭 구속사관으로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구원만을 위한, 인간중심만의 그 이기심 충만한 구속사관 말입니다. 그것만 말고 보다 깊이 성경을 보아줄 수는 없겠습니까. 아담과 하와이며 카인과 우리 모두는 오직 예수의 보혈로써 구원을 받았다는 그 진리! 암요. 영원히 아멘이올시다. 그러나 주님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까닭이 과연 그뿐이겠는지요.

가령, 대홍수로 인해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던 바로 그때, 주님은 울었을까, 웃었을까? 궁금한 것이 어디 그뿐이겠는지요. 작금의 옴팍 썩어가는 이 땅의 시대정신 등등, 대홍수와 골고다 십자가 후로도 인간의 죄성은 더하면 더했지,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무섭게 변질되고 말았음이 아닙니까. 그대의 전도폭발도 불발탄이 됐고요. 그렇다면 대홍수의 그 목적은? 십자가 지셨음의 대의요 그 목적은? 인간의 죄 때문에? 아멘! 이 촌놈 역시 영원히 아멘이고 말구요.

그러나, 그러나, 교인 몇몇만의 생전의 행복이랄지, 벙거지 뒤집어 쓴 교황 따위를 향한 광적인 난리랄지, 우후죽순처럼 뻗쳐올라가는 십자가 첨탑들의 그 위용? 사후천국의 종교적인 인증샷이며 그 효험? 그밖에 뭔 좋은 결과가 있었는지요. 차라리 서민들의 고통일랑은 훨씬 더 더! 없는 자들의 슬픔 역시 더 더! 사탄의 광란도 훨씬 더 더! 과연 이러한 꼬라지를 보자고 주님은 그 야단이셨을까요? 아니셨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대홍수와 그토록 참혹하셨던 십자가 지셨음의 영원목적은 진정 무엇?

간청하오니, 제발 종교의 고정관념을 잠시 내려놓고서 깊이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주님은 참으로 에덴동산 때에도 그러셨던 것처럼, 지금의 탄식과 자살의 폭증이며, “못살겠노라의 장탄식이 다반사이건만, 하나님은 정녕 어디에서, 대체 무얼 하고 계신다는 말입니까. 수많은 목숨들이 무슬림의 테러 탓에 속절없이 무수히 죽어가고 있건만, 3포를 넘어 57포의 시대로 돌입하고 말았는데도 주님은 왜? ? 침묵뿐! 침묵만! 팔짱만 끼고 있는 것 같은 그대의 그 잘난 아버지 여호와 말입니다.

다만 오해할까 저어되어 드리거니와, 제가 감히 진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를 아버지로 받들도록 부추기는 사탄의 걸작 그 정통교리는 사탄을 닮아 몹시 천박하고도 매우 경망스럽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여. 제발 거기에 목을 매지 말고 왜? ? 주님은 여태껏 침묵만 하시는지에 관해 고민이라도 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대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요컨대, 이기심으로 가득한 정통교리가 아니오라, 사람을 지으신 원 목적이며,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여호와의 생기에 관한 그 정확한 무엇들을 그대는 진정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관절 왜? ? 여호와 자체인 그 생기를 아담에게 불어넣으셨을까요? 흙덩이에 불과했었던 아담에게 생기를 굳이 불어넣어 마침내 생령! 곧 살아서 일어나 여호와 자체인 그 생기요 영적인 무엇을 인간의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나게 하셨을까요? ? ?

 

기독교여. 여호와께서 인간의 죄 탓에 홍수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성경은 말하지만, 홍수 후에도 타락의 기세는 강화되고 있었을 뿐이 아닙니까. 여호와의 생기로 거동하는 한, 죄를 안 짓고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는 인간본성이요 여호와 자체인 그 생기 곧 성욕말입니다. 본능이라는 멋진 가면을 쓰고는 있지만, 주님의 병리적인 옛 이름, 옛 생기 곧 여호와 이름의 현상적인 실체가 바로 성욕이 아닙니까.

그대여. 주님의 옛 이름에 불과한 그 여호와를 아버지로 받드는 너절한 종교행위가 아니라 최후의 사명 말입니다. 구약성경 내내 인간의 현실역사로 폭로되고 있었던 여호와의 민낯이며, 자비의 이름인 듯싶지만 결코 그럴 수가 없었던 그 이름 여호와에 관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그대의 마지막 사명 말입니다.

묻사오니, 그대는 과연 아십니까? 성경으로서 여호와의 본질을 낱낱이 들춰내셨던 하나님의 참 마음을! 정녕 알고는 계십니까? 인간창조에 얽혀있는 그 깊으신 의중을! 보세요. 정말로 주님이 모르셨을까요? 인간이 타락할 줄을 모르고 사람을 만드셨을까요? 만일 타락의 불가피성을 모르는 채 인간을 덥석 만드셨다면, 전지전능? 글쎄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통교리로는 결코 알아챌 수도 없는 에덴동산의 감춰진 사실들이며, 성경 가로되,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곧 뱀이 가장 지혜롭더라! 아시다시피, 영적인 전투의 승패 여부는 지혜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똑똑한 뱀과 더불어 에덴동산에 아담을 살게 하셨던 그 찜찜한 창조의도 말입니다. 살라고? 죽으라고? 대관절 왜 그러셨는데? 간청 또 간청하오니, 창조주께 받은 그대만의 특별한 권능인 그 생각의 능력을 제발 썩히지 마시고, 보이는 성경의 그 한계성 너머로 생각의 나래를 펼쳐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대여. 여호와는 다 아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만 후회하셨다느니, 한탄하셨다느니, 그러한 성경 까닭에 분명히 알게 되었거니와, 전지하신 여호와는 무슨!! 말뿐이었던 여호와의 그 전지성의 허구를 폭로함으로써 왜? ? 그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폐기해야만 하는가에 관한 그 당위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구약성경의 면면들이 아니겠는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뱀의 지혜는 인간을 타락시키기에 충분했건만, 그 뱀이 있는 에덴동산 안에 어쩌자고, 어쩌라고, 사람들로 하여금 구태여 살게 하셨던 것일까요? 시차의 다름만 있었을 뿐, 그 뱀에게 당할 것은 자명한 노릇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요컨대, 주님의 옛 이름 여호와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은 그것의 결과가 그리되고 말 것을 모르지 않으셨건만, ? ? 뱀이 있는 에덴동산에 그 가엽은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던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에덴동산은 본시 기쁨의 곳이었는데 뱀이 들어와서 사람을 타락시켰다고 그대는 주장합니다마는, 그 정통교리보다 훨씬 깊은 주님의 창조의도에 관해, 이제는 생각이라도 좀 해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심히 답답할찐저, 머리만 커다란 젖먹이들이여. 그대의 구속사관이 전부가 절대로 아니지 않겠습니까. 간곡히 청하오니, 야트막한 그곳에서만 퐁당거리지 마시고, 가라 창파로! 자라나라 높이! 성장하라, 아이로부터 주님의 신부다움으로, 제발!

제가 한때 개척교회를 하고 있었던 마포구 도화동 우리 교회 근처에 공중목욕탕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침 목욕을 하러 갔었던 어느 날, 그곳에 웬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꿈쩍도 않는 채로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 왜소한 저로서는 괜히 신경이 쓰였는데요, 그러나 이거야 원! 한 꼬마가 그 청년 곁에 다가오더니만, “이 병신아! 뭐해?” 그 덩치는 정신장애자였었고 꼬마는 그의 동생이었지 뭡니까.

그렇습니다. 몸만 굵을 뿐, 젖만 빨고 있는 그대여. 주님은 토기장이요 그대는 토기일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그대를 위한 구속사만이라고 주장하는 그대의 정통교리는 앞뒤가 뒤바뀐 오만함이 아니겠는지요. 인간구원마저도 사탄의 포박을 위한 그 한 목적적 방편일 뿐입니다. 그 한 목적 곧 참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만인만물이 창조된 것이며, 납득할 수 없는 성경의 많은 사건들 또한 그 한 목적적 성취를 위한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59:11,14)

 

기독교여. 아시다시피 모든 구약성경은 인간사를 빙자한 하나님의 옛 이름 여호와에 관한 자기폭로요 자기고백이올시다. 본문의 이 혹독한 증오심 또한 인간 다윗의 분노가 아니라, 사탄의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상처요 그 큰 분노가 아니겠습니까.

그 상처를 치유 받고자 성경책을 기록케 하셨던 것이며, 주님의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인간들을 통해 사탄으로 말미암았었던 그 한을 풀고자, 성경속의 내밀한 성경 곧 문화적인 강림을 단행하셨던 것입니다. 강조하거니와, 여호와와 예수는 한 분 하나님의 두 속성이요 두 이름일 뿐입니다. 그 두 이름의 본질들이 성경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그 책의 처처에서 탄식이니 한탄이니, 전지하지 못하게시리, 마치 그리 될 줄을 몰랐다는 듯, 뒤늦게 분노하고 있는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본문으로 폭로되고 있는 그 여호와는 아버지는커녕 하나님의 이름이라고도 부를 수가 없을 만큼 잔혹한 무엇이 아니겠는지요. “! 그거! 사울에 대한 다윗의 분노야.” 여전히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그대는 아직도 성경의 기본조차 모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주님의 자기고백서인 성경책 또한 종교경전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마는, 그것들 역시 종교적인 훈육이기보다는 차라리, 장차 이루고자 하시는 새 시대에 관한 하나님 자신의 꿈과 소망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볼 수는 없지만 읽을 수도 없지만, 보이는 본문을 통해 분명히 깨달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 나름의 그 간절한 열망 말입니다. 원한으로 가득한 본문성경의 내용입니다마는 그것은 단지 겉 글자들의 무엇일 뿐 안 보이는 그 속내인즉은, 그토록 처참한 주님 자신의 옛 본질 여호와 대신에 사탄 없고 원한 없는 새 시대가 왔으면곧 새 이름 예수를 향한 여호와의 단말마적인 꿈의 외침이 아니겠는지요.

요컨대, 사탄에게 당하신 배신 탓에 병리적 이름이 되어버린 여호와이지만, 그러기에 더욱더 사랑과 평강만의 그런 나라, 그런 시대 곧 그 이름 예수를 향한 주님의 그 뜨거운 열망이 정녕 보이는 본문의 안 보이는 성경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답답한 그대는, 예수부활 후의 신약성경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주님의 옛 이름 여호와를 아버지로 받들다니요! 대체 누가 그대를 그리도 바보로 만든 것입니까. 주님의 병명인 그 여호와를 아버지라 믿는 그대는 다만 우상숭배자 뿐임을 왜 아직도 모른단 말입니까.

성경 첫머리의 그 중한 말씀 말입니다. 천사장의 배신 탓에 옛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휩싸였었더라. 그런데도 원 창조? 재창조? 시방 장난합니까? 간청하오니, 정통교리의 그 유치한 억압으로부터 제발 벗어나소서! 눈을 좀 부릅뜨고 다시금 성경책을 보소서! 그리하면 아시리라. 성경 처처에서 그대의 사랑을 곧 성경의 그 깊은 깨달음을 오매불망 사모하시는 그 슬프고도 고독한 참 하나님을!

! 벌컥 화를 냈다가도 한 순간에 가라앉는다거나, 그 까다로운 하나님의 옛 상처 곧 그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처음 아내 루시엘의 배반 때문에 큰 상처를 입으셨거니와, 구약성경 처처에 하나님의 탄식자체인 난해구절의 함정들을 파놓으셨으며, 우리더러 거기에 꼭 좀 빠져달라고 곧 주님의 아픔을 꼭 좀 깨달아달라고, 지금도 계속 비명을 지르고 계시는 그대의 고독하신 그 주님의 그 처절한 절규 곧 구약성경책의 모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방언은사를 받은 후, 노숙자 주제에 왜 그렇게 들떴었는지, 꼭 미친놈 같았지 뭡니까. 날밤을 새우며 철야기도는 기본이었고요, 삼각산이 떠나갈 듯이 고래고래 찬송이며 방언기도며, 엄청 신이 났었습니다.

그러다가 기막힌 생각이 확 떠올랐지 뭡니까. 삼각산에 절이 하나 있었고요, 새벽 4시면 꼭 탑돌이를 하던 스님들이 있었는데요, “요것들을 겁줘야지. 이건 주님의 뜻이야!”라고 하는 믿음(?)의 예쁜(?) 생각이 저에게 왕창 밀려왔지 뭡니까. 바로 다음 날, “좋았어! 중들을 겁줘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드디어 새벽 4! 어김없이 그들이 나오고 있었고요, 그때부터 저는 들입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불교마귀야 꺼져라! 중 마귀야 떠나가라!” 아마도 한 시간가량은 족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고야! “어떤 개새끼가 떠들고 있어!”라는 큰 소리와 함께 몽둥이를 꼬나든 여러 스님들이 웃통을 벗어부친 채로 올라오더라고요, 글쎄!

형님. 그때 제가 어쨌을까요? “그거야, 너는 본래부터 그랬으니까 당연히 맞장을 떴겠지!” 그러나 맞장은 무슨!! “아이코! 당장에 토껴야 되겠네.” 후다닥 도망을 쳤고요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지 뭡니까. 진짜 믿음이 결코 아니라, 이 아우의 그 너절했었던 종교심 따위의 옛 꼬락서니로 말미암아 성령님은 얼마나 쪽팔리셨을지, 나 원 참!

아론에게 ..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로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40:13)

 

기독교여. 본문의 아론이 대체 누굽니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었고 그 앞에 절을 하도록 선민들을 부추겼었던 우상숭배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에 따르면 당장에 돌로 때려죽여 마땅한 큰 죄인이었으며, 대제사장 자리의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던 그 따위의 아론을 왜? ? 여호와는 구태여 가장 거룩하다는 대제사장 자리에 앉히고 말았을까?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대의 그 잘난 아버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니 무조건 아멘일 뿐입니까? 그런 겁니까?

하기사 그대는, “회개했으니, 된 거 아냐?” 하오나 회개는커녕 자기의 죄를 백성들 탓으로 돌렸었던 그 비열한 아론을 대제사장 자리에 굳이 앉혀버렸었던 그 이상한 여호와 말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그 물색없는 여호와를 낱낱이 공개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그 저의가 과연 뭘까 하는 진정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부활 후에 기록케 하신 신약성경은 여호와 이름을 거명조차 않고 있거니와, 따라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 여호와는 당연히 영적인 시체 이름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 시체를 아버지라니요. 그 무슨 정신 나간 짓입니까.

물론 그대는 핏대를 올리면서, “이 악독한 이단 놈아! 야훼가 시체라고! 너는 부활도 몰라?” 왜 모르겠습니까. 여호와로 죽고 그리스도로 부활하여, 예수 이름의 왕관이 됐지만 부활하신 주님 이름은 여호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물론 그대를 이해는 합니다. 여호와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기적 탓에 잔득 쫄아 있는 그대이므로 그 이름을 들먹이는 것조차 금기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여호와 이름의 뜻은 아직도 베일 싸여있다거나, 그 실없는 종교적인 경외심은 차라리, 예수 이름으로서 자신을 일신해버리신 참 하나님께 대한 모독임을 정녕 모르겠는지요. 보세요. 중인환시하는 가운데에 그것도 십자가의 나체라는 비참한 상징적 모습으로써 창세전부터의 자신의 부끄러움을 낱낱이 폭로하셨거니와, 그러므로 옛 이름 여호와 때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신 진짜 하나님께 대한 배신일 뿐인 그대의 그 종교심 말입니다.

그대여.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 나름의 거듭남이시라함을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따라서 마땅히 성경책은 결코 종교경전이 아닌 것을! 참 성경을 덮고 있는 허울에 불과한 것을! 철저히 자신을 숨기시사 우리더러 제발 찾아와 달라는 곧 그 진리 그 진실을 깨달아 달라는, 그대의 몹시 외로우신 진짜 하나님 말입니다.

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경외심으로 포장된 종교성향의 경배가 아니며, 군주에 대한 충성심도 아니라, 오직 주님과의 인격적이며 수평적이요 순수한 그런 사랑일 뿐입니다. 그거 한번 받고파 성경이 되셨으며, 성경의 보이고 읽히는 겉 글자들 속에 깊이 파묻혀 계시면서 그대가 찾아와 주기를 곧 성경책의 참 뜻을 깨달아주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그대의 진짜 하나님이 아니겠는지요.

맞습니다. 옛 천사장 루시엘에게 실컷 받으셨던 종교적 경배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 그거 받고자 십자가의 예수는 그토록 아파하셨거니와 그대가 신주처럼 끼고도는 그것은, 종교냄새 지겨운 정통교리는 꼭 혁파 돼야 마땅한 사탄의 음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소망은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그때 비로소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참 사랑일 뿐, 자기 혼자만 높임을 받는 종교적인 예배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차원으로 육신이 되셨거니와 창세전, 처음 아내 루시엘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온갖 오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바알 따위를 질투하는 초라함을 보이면서까지, 구약성경 내내 주님은 몸부림을 치시며 비명을 지르셨음이 아닙니까.

거듭거듭 강조하거니와, 하나님은 영원히 한분뿐이십니다. 예수도 여호와도 따로따로의 두 하나님이 절대로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두 이름일 뿐이라 함을 잊지 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왜냐고요? 유일신 신관만이 참다운 천국의 영원한 기둥이므로!

 

다윗이 .... .. 아히노암을 취하였더니 그들

두 사람이 자기의 아내가 되니라.(삼상25:43)

 

기독교여. 무식한 제가 감히 그대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그대가 받들어 봉독하는 그 성경책은 주님의 치부인 여호와 이름을 곧 여호와 말씀을 성육신시키기 전, ? ? 성육신시킬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주님의 자기소명장이며, 보이도록 드러내신 그 이름 여호와에 관한 문화적인 현현이 아니겠습니까.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 그것은 주님이 직접 정하신 중대한 계명이었건만, 여호와 스스로 자신이 정한 계명을 여지없이 짓밟은 가운데 살인을 서슴없이 자행했었던 것이 아닙니까. !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살인?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면 심판? 말도 아니거니와, 자신의 계명을 여호와 스스로 무시하면서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이고, 어디 그뿐입니까. 본문성경의 그대가 닮고 싶어 하는 그 인간 다윗 말입니다.

나발의 죽음을 거쳐 그의 여자 아비가일을 아내로 취한 직후였건만, 금방 또 다른 여자를 품에 안다니! 끝끝내 그 음탕한 버릇을 못 버렸으며 다윗은 자신의 음란한 그 버릇 까닭에 패가망신을 겪었었더라. 그런데도 여호와는 계속, “나의 종 다윗? 내 사랑 다윗?” ? ? 그리도 호들갑을 떨었을까요?

물론 다윗이 남달리 여호와께 충성했음을 어찌 부정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문만은 정녕 아니었으리라. 다윗은 여호와의 판박이였음으로! 구약성경의 그 많은 부분들은 다윗의 탄생을 위해 그리도 번다하지 않았습니까. 가령,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4:18,22).” 등등, 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그렇게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여호와의 모형으로써 실로 오랜 세월의 치밀한 작업으로 인해 비보통의 사람이며, 안 보이는 여호와의 보였던 실체요, 여호와의 상징인 다윗을 마침내 탄생케 하셨음이 아닙니까. 따라서 안 보이는 여호와의 보였던 실체일 수밖에 없는 그 사람 다윗의 삶을 통해, 여호와의 감춰진 면면의 문화적 성육신인 구약성경을 통해, 여호와의 비참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계시는 참 하나님이 아니겠는지요.

그대의 롤모델 다윗 말입니다. 그는 대체 누구인 것입니까? 여호와의 은혜를 독차지 했었던 곧 여호와를 꼭 닮았었던 그 다윗은 암요. 골리앗을 죽이는 살인을 통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거니와, 각종의 전투에서 수도 없이 죽이고 또 죽였었던 희대의 살인자가 아니었습니까. “여호와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다?” 그대가 좋아하는 승리의 표피성이 아니라, 여호와가 다윗을 이기게 하셨던 그 승리의 방식말입니다. 항상 이기게 하셨음 곧 죽이고 또 죽이고 많이 죽이게 하셨음(삼하8:5,13,14)!

대량 살인을 이김의 방법으로 삼곤 하셨던 여호와였지만, 만일 예수가 다윗을 이기게 하셨다면 예수의 승리방식 역시 살인이었을까요? 차라리 죽이느니 당하라!” 분명히 그러셨으리라. 두 이름 간의 현저한 차별성을 과연 납득하시겠는지요.

잔인하게, 잔혹하게(삼하8:2), 죽이고 또 죽이고, 끔찍한 살인자로 평생을 살아야 했었던 피의 사람 다윗 말입니다. 유언조차도 요압과 시므이를 꼭 죽이라는 핏빛갈의 고명이며 살인의 마침표를 찍었을 만큼, 피의 사람 다윗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왜? ? 여호와 그 이름은 그토록 다윗을 사랑했을까요? 다윗은, 다윗은, 여호와의 판박이였음으로! 여호와의 병리적 성정으로 살아야했었던 여호와의 모형 다윗이었음으로!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 헷 사람 우리

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삼하11:3)

 

기독교여. 여호와의 모형인 다윗과 그의 내연녀 밧세바와 그녀의 남편 우리아, 이 셋의 그 비정한 관련성 말입니다. 사람을 그만큼 죽였으면 충분할 뻔도 했었건만, 또다시 다윗은 야비하고도 잔인한 살인교사조차 마다치를 않았었더라.

아시다시피, 우리아는 실로 의리의 사나이였지만, 간통의 은폐를 위해 다윗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는 또 한 번의 피의 스토리가 아닙니까. 게다가 그 충직한 우리아가 하필이면 몰수이 죽여 버려야만 했었던, 가나안 7족속 중에 하나인 헷 사람이었노라 밝히고 있는 구약성경의 그 잔인한 신비 말입니다. ? ?

안타까울찐저, 남자로써는 최고의 싸나이였지만, 전장에 남편을 보내놓고 심히 초조했었을 자기 아내 밧세바의 외로운 여심일랑은 전혀 헤아리지를 못했었던 우리아의 그 강직성! 마치 여호와 자체인 율법처럼 말입니다.

암요. 율법의 모형인 우리아처럼, 공의와 강직으로 충만했었던 율법이 아닙니까. 인간들의 약함과 피치 못할 희망사항일랑은 헤아리지도 않는 채로, 죄에 대해 철퇴를 가하곤 했었더라. 40년 광야 생활 내내, 여호와 곧 율법의 엄혹함인즉은, 자기 아내 밧세바에게 배려가 전혀 없었던 돌쇠남편 우리아와 어쩌면 그토록 닮았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아는 율법의 모형이올시다. 철저했었던 그의 충직함이랄지, 타협이란 애초에 있을 수 없었던 우직함이랄지, 그 사람 우리아의 비참은 암요! 여호와요 율법에 대한 천기누설이 맞습니다. 하여 율법의 상징 우리아는 곧 반드시 죽여야 했었던 가나안 7족속의 하나인 헷 사람 우리아의 비극은, 율법 자체인 여호와의 숙명 또한 성육신이 되어 반드시 죽으리라함의 은유적인 계시가 아니었겠습니까.

요컨대, 여호와 이름에는 그대의 상식과는 크게 다르게도, 치명적인 결함이 없지 않고 많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본색은 그 이름 스스로의 선하다느니 인자하다느니, 그 멋진 공언들과는 많이 다른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그 이름 여호와를 영구히 폐하시고자, 사람간의 관계를 빗대어 여호와의 병리적인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는 성경은,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고발장이 아니겠는지요.

목사님. 지나가는 똥개가 웃을 노릇이었지만 제가 교회개척을 다 했지 뭡니까. 기적의 속출이었고요, 귀신들이 소리치며 떠나가는 것은 보통! 의사가 포기한 말기환자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그러나 그 눔의 혈기 말입니다. 죽도록 싫었고요, 아예 잠자리를 강대상 뒤로 옮기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온 밤을 꼬박 새워가며 기도했다는 것은 아니고요, 자다가 졸다가! 졸다가 자다가!

그날도 그러고 있었는데요, “아이고! 사람 죽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을 두들겨봤다가 별 짖을 다해봤지만, 온 몸이 더욱더 억압이 되면서 잠깐 후에는 꼼짝달싹 못하도록, 손가락을 까딱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도를 하긴 해야겠는데 혀마저 움직여지지 않았고요, 몸 전체가 경직이 되고 말았지 뭡니까.

형님. 그때 제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원 세상에! 무에가 그런 경우가 다 있었더란 말입니까. 잠을 자다가 갑자기 온 몸이 마비가 되다니요. 세포의 하나하나까지 그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완전히 억압되고 말았지 뭡니까.

그러나 정신마저 혼미해져 가던 바로 그때, 퍼떡 떠올랐던 생각이 하나 있었는데요, “악마구나! 보통 쌘 놈이 아니야, 쫓아내야해. 안 그랬다가는 죽고말거야!” 사력을 다했지요. 진땀이 흐르고 있었고요, 혀조차 움직일 수 없었기에 목소리를 내 속으로부터 밀어내고자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싸웠었습니다.

한참 만에 우선 먼저, 뻣뻣하니 움직이지도 않았던 혀가 돌연 확 풀리게 되었고요, “이 더러운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꺼져버려!”라고 외칠 수 있게 됐습니다마는, 아니 글쎄! 그때로부터 십여 년 전, 신학교 입학식을 며칠 앞두고 있었던 그때에 꿈에서 봤었던 바로 그 악마였지 뭡니까.

시커먼 철 비늘을 뒤집어쓰고 있었고요 흉악하기 짝이 없었던 그 괴물 말입니다. 내 속에서 빠져나오더니만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두터운 예배당 벽을 아무런 막힘도 없이 연기처럼 스으윽 사라지지 뭡니까. “순 거짓말, 뻥 까고 있네!” 진짜로요.

 

다윗이 .. 솔로몬 .. 여디디야 .. 이는 여호와

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삼하12:24,25)

 

기독교여. 다윗은 누가 뭐래도 여호와의 모형이올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어지러운 속성처럼 그의 특별 은총을 입었었던 곧 여호와를 쏙 빼닮았었던 다윗 역시 그 여호와처럼 죽이고 죽임이요, 피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특별히 본문 말입니다. 다윗은 장자 우선이라는 율법의 도리를 외면한 채로, 장자 아도니야가 아니라 그 찝찝한 여인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세웠더라. 여호와의 완벽한 개입으로 말입니다. 친히 제정한 여호와 자체 곧 율법이었건만(21:16,17), 여호와 스스로 자기의 법을 무시한 채로 비장자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음이올시다. 다윗의 무엇인양 성경은 그렇게 적고 있지만, 다윗은 진정 여호와의 모형이었기에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당연히 여호와의 처사가 아니었습니까.

그 이상한 여호와의, 그 이상한 솔로몬 말입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탄생 때부터 여호와의 유별난 사랑을 받았지만, 그 이름의 특별은총은 별무소용인 채로 솔로몬 왕은 어처구니없게도 우상숭배자가 되고 말았으며(왕상11:4.5), 여호와는 분노하게 되었고 나라는 두 쪽이 나고 말았고요. 이 얼마나 웃기는 얘기인 것입니까. 여호와가 선택했고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여 애기 때부터 공을 들여 살뜰히 보살폈었던 솔로몬이었건만, 그러한 그가 첩들인 사람의 꼬임에 넘어가 우상숭배자가 되다니요. 그렇다면 여호와의 공력이 사람의 그것만도 못하다는 겁니까, 뭡니까?

아무튼, 그대는 여호와의 독선을 그 이름의 당연권리인 듯 말하고 있지만, 율법에 대한 철저한 순종의 예수와는 다르게시리, 말 다르고 행동이 다른 여호와가 아닙니까. 사람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면서도, 여호와 스스로는 자신이 세워놓은 율법에 불복하곤 했었던 모순된 처사가 다반사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정말로 문제는, 장차 있을 솔로몬의 배신을 여호와는 사전에 과연 몰랐을까 하는 것이며, ‘여디디야라고 작명을 하면서까지 왜 그토록 솔로몬을 사랑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와의 배신을 모르는 채로 그를 만들었다거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본다고 장담은 했지만 실은 사울의 중심을 모르면서 그를 왕으로 세웠다거나, ? ? 여호와는 모르는 것이 그리도 많았던 것일까요?

그런데도 여호와 가로되 자기는 전지하다고 다 안다고 늘 그러셨지만, 본문은 여호와의 또 다른 모름이 아닙니까. ‘여디디야라느니 호들갑을 떨면서 내일의 우상숭배자 솔로몬의 탄생을 크게 기뻐했었지만 여호와의 그 모름의 결과물인 솔로몬 까닭에 통일왕국은 둘로 쪼개지는 비극을 낳고 말았더라.

물론 인간의 죄 탓이었지만, 여호와 역시 그 원인으로부터 결코 자유 할 수 없음도 사실이 아니겠는지요. 전지전능은 무슨!! 당신의 생기로 자기가 만든 인간들이었건만, 그들의 한 치 앞도 모르는 가운데, 그 이름 여호와는 시행착오를 범하곤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의 작품인 사람들로 말미암아 늘 끌탕을 했었던 살짝 멍청한 여호와 말입니다. 하기는 그대의 잘 생긴 그 아버지 여호와께서 자유의지를 위해 그럴 수밖에 없으셨다는 변설입니다마는, 약방의 감초인 그 자유의지? 암요. 기똥차고 말구요.

게다가 선한 목자라느니, 여호와의 그 말씀은 단지 공허한 언어의 유희였을 뿐, 그가 개입하던 일들마다 별로였지 않습니까. 자비하다는 여호와의 자기호언과는 완전 거꾸로, 늘 시끄러웠고 피 비린내의 연속이었고요.

여호와만을 경배하라!” 하셨던 여호와의 유일한 소원조차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솔로몬도 이스라엘도 유다도, 잡신을 섬기는 배신을 일삼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여호와는 분노를 했었고, 그 분노 탓에 모두가 멸망하고 말았지요. 선민들을 향한 여호와의 짝사랑은 빛도 한번 못 보는 채로 비참하니 그렇게 말입니다.

따라서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이방인들은 비록 잡신이라 할지라도 자기네의 신을 끝까지 섬겼건만, 여호와가 친히 선택한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자신들의 신 여호와를 왜? ? 배신을 했던 것일까요? 그들만 본시부터 못된 족속이라서? 아니라면 혹시나 사람들 때문이기보다는, 그 이름 여호와의 숙명적인 그 어떤 속성 때문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 너 열국을 엎

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14:12)

 

그토록 사랑했었던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했던 다윗처럼, 그토록 사랑했었던 창세전의 처음 아내 천사장 루시엘에게 주님은 배신을 당하셨더라. 보십시오. 다윗과 압살롬! 하나님과 처음 천사장 곧 사탄!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배신과, 주님께 대한 사탄의 배신! 그러기에 본문에서 보듯, 사탄에게 상처 받은 여호와에게는 그 악마로 말미암은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의 기운이 있는 것이며, 그 속성이 어디로 가겠는지요.

옛 이름 여호와 역시 하나님 자신처럼 영적 실존이므로 주님 친히 창조적 역사로서 자기의 상처인 그 여호와를 자신으로부터 제거하시기 전에는 주님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시든 속히 혹은 서서히 시차적 다름만 있을 뿐, 여호와적인 배신과 분노의 기운이 결국에는 모든 것을 그 배신 그 분노로써 변질시킬 수밖에 없음이 아니겠는지요.

가령, 메르스 환자와 함께했다면, 조만간 자신도 메르스에 감염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여호와의 감염 곧 그 이름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도 역시 여호와를 닮지 않겠습니까. 여호와를 섬기는 모든 사람과 민족은 시차만 있을 뿐, 어차피 배신과 분노라는 여호와적인 병을 앓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민들이 그러했으며 여호와의 손때 묻은 그대 역시, 여호와의 병적인 그 속성 탓에 타락이라는 배신의 병을 앓고 있고요.

물론 이 촌놈의 말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므로 그대의 공분을 사리라 짐작은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수많은 그 현란한 군더더기의 흐름 속에 말려들어 핵심을 놓쳐왔었던 지금까지의 우를 계속 범할 수는 없지를 않겠습니까.

! 기적이니, 이런 말씀 저런 말씀, 덕지덕지 많고도 많지만 구약성경의 중심은 딱 하나! 그 이름 여호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이며 그 본질일 수는 절대로 없음! 가령, 신만의 홀로 높음과 피조물의 낮음이며 그 수직적이요 종교질서 안에서는 또 다른 사탄적 배신이 거듭될 뿐이기에 주님의 그 속성 그 버릇 곧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일 수는 없음! 하여 주님도 자신의 옛 이름인 그 여호와요 종교질서를 혐오할밖에 없으셨거니와, 당신으로부터 여호와 그 이름, 그 버릇, 그 속성을 없애기로 창조의도를 세우셨고 그 뜻이 광포되도록 하셨는데 문화적인 강림곧 구약성경이 아닙니까.

십자가에서의 그 처절했었던 비명 말입니다. 그대는 예수의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실은 몹시 섭섭해 하셨던 여호와의 비탄이 아닙니까. 배신과 복수, 죽고 죽이고 등등, 불치의 중증을 앓고 있었던 자신의 옛 이름 여호와에 대한, 하나님의 포기각서와도 같았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지요.

아픔과 배신감과 절망의 이름이었기에, 또한 간절한 꿈과 소망의 역설적인 옛 생기 여호와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모든 예언서들의 마무리마다 간곡한 소망으로 마침표를 찍고 있었던 가엽은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은 받들어 봉독하는 종교경전이 아니고 말구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옛 이름 여호와를 왜? ? 포기할 수밖에 없는가에 관한, 검사의 논고문과도 같은 구약성경인 것이며, 여호와의 그 험난한 본질 그대로를 가감 없이 적고 있기에 구약성경 또한 험난한 노정기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이름 여호와를 주님으로부터 영구히 제거하시는 최후의 과정이 아니겠는지요.

그대여. 말씀은 단지 여호와 가라사대예수 가라사대의 두 말씀뿐! 그런데 어느 말씀이 육신이 됐을까요? 당연히 여호와 그 이름 곧 그 말씀이 죽음의 계명을 입고 육신이 되었음이올시다. ‘예수 가라사대가 전혀 없었던 최초의 성탄절 이전이었음으로 육신이 된 말씀은 분명히 여호와 가라사대인 것입니다. 경전냄새로 가득한 여호와 가라사대이며, 구약성경의 그 겉 글자들 말입니다.

그것들은 다만 퇴출운명의 옛 생기이며, 모든 종교의 본질인 여호와의 적나라한 정체성임과 동시에, 주께서 영원토록 갈망하시던 여호와의 종교시대 그 이후의 자유 자체 곧 예수 이름에 관한 그 찐한 꿈과 소망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 산에 .. ‘유암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

데 여호와께서 ... 말씀하시되. (4:11~12)

 

기독교여. 본문성경의 그 황당한 여호와의 비밀 말입니다. 유암? 흑암? 그게 대체 뭔 요상한 말입니까. 만일 여호와가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일진데, 시커먼 유암과 어둠의 흑암이 결코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밝고 맑은 영들이 여호와를 감싸고 있어야 했건만, 유암? 흑암? 암요. 여호와 이름의 비통한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시커먼 그 유암! 그 흑암! 성경 최대의 비극적 신비가 아닙니까.

검다느니 시커멓다느니! 악마의 상징이건만, 여호와를 휩싸고 있는 본문의 그 어두움들 말입니다. 그렇고 말구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어둠의 이름 그 여호와의 졸개인 그대의 열매들이며, 그대의 전도폭발로서 폭발되어버린 조국의 검은 현실 말입니다. 유암과 흑암 자체인 잡종교의 하나로 전락한 그대의 검은 모습을 꼭 닮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그대는 또 전도폭발? 또 세계복음화? 시방 장난하십니까?

여호와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도 부당하기에 그 이름을 제거해야할 연유를 주님은 성경을 통해, “흑암! 유암!” 여호와의 그 참담한 본질을 분명히 밝히고 있건만, 어두운 그대는 그 여호와를 여전히 아버지라니요!

묻사오니, 천주교나 불교나 그 천한 것들처럼 너절한 종교 따위로 전락해버린 기독교여. 과연 그대는 알고나 계십니까? 여호와 주변의 그 흑암! 그 유암! 그것들의 대표적 어두움인 성욕말입니다. 아담의 코에 주입된 여호와 생기 곧 인간 모두에게 결합된 그 성욕이야말로 영적인 여호와의 실제적 유암이며 현실적 흑암이 아니겠는지요. 성욕과 성행위! 그로 인해 음풍이 휘몰아쳤었고 홍수심판이 있었지만, 더욱 지독하게 인간 모두에게 들붙어 있는 그 성욕 곧 여호와 자체인 그 생기 말입니다.

보세요. 여호와 자체인 그 성욕으로 말미암은 낳고 죽고가 구약성경을 온통 뒤덮고 있지만, 예수부활 후의 신약성경은 왜? ? 성욕에 의한 낳고 죽고의 사건을 아예 실종시키고 말았을까요? 구약과 신약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큰 차별성 까닭에, 마침내 여호와 이름도, ‘낳고 죽고도 영원히 퇴출되고 말았음이 아닙니까. 요컨대, 구약적 삶의 행과 불행은 성욕에 의해 좌우되었던 시한부적이요 육적인 것들이었지만, 예수 안에서의 행복은 안 보이는 영혼의 영원불변한 영적인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큰 성도 중 한 사람인 히스기야 임금 말입니다. 천수가 끝날 즈음에 마치 저주라도 받은 듯, 더 살게 해달라고 몸부림을 쳤었고 15년을 연장 받았지만, 만일 신약의 성도가 죽으리라의 예언을 받는다면 울고불고는 무슨!! 영원천국을 바라보며 엄청 행복해하리라. ? ? 전자는 폐기될 여호와의 그 생기 곧 성욕과 연락된 한시적이요 육적인 믿음이었음으로! 후자는 영원한 그 이름 예수의 참 믿음이므로!

또 묻사오니, 구약적 믿음만의 처량한 그대여. 여호와 자체인 그 생기 곧 성욕의 본질인 유암과 흑암이며 그 어두움의 기운들 말입니다. 성욕은 음욕이 되었고 성행위는 음탕이 되어 난리도 아닙니다마는, 문제는 왜? ? 애초에 그 성욕을 곧 여호와 자신인 그 생기를 사람에게 본능이며 영적인 기운으로서 입혔는가 하는 정녕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그 더러운 혈기마귀가 나갔으니 이젠 됐겠지!” 했었던 그 방심!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가 하는 것을 금방 알게 됐지 뭡니까. 제가 심방사역자로 임명도 안 해줬건만, 그 악마가 교인들의 가정을 일일이 심방해줄 줄이야 꿈엔들 알았겠습니까. 그 마귀 교역자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지 뭡니까.

그 분의 심방을 받은 가정들마다 부부싸움은 다반사였고요 끼리끼리 모여 작당을 한다거나, 끝내는 전만 같았더라도 있을 수도 없는 바로 그것까지! 아니 글쎄, 귀하신 주의 종님(?)에게 감히 대들기가 까지!

결국에는 기둥집사 몇몇이 아예 호적을 파버렸지요. 우리 교회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같은 교단의 또 다른 교회가 세워졌었고, 그 교회의 똘똘한 목회자님께서 저들을 남여선교회의 회장을 시켜줬다나, 뭐라나! 많은 교인들이 덩달아 떠나고 말았고요, 저들의 빈자리가 얼마나 크게 여겨지던지요. “그게 다 연단이라고요?” 연단 좋아하시네! 형님도 한 번 당해보구려, 그런 말이 나오나! 아무튼 저로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떠나자, 남쪽으로! 가자, 물 좋은 강남으로!

물론 주님께 왜 안 물어봤겠습니까. 당연히, “갈까요? 말까요?” 그리하여, “좋았어! 떠나는 거야!” 주님의 뜻인 것만 같아서 말입니다.

결과요?” 시방 놀리는 겁니까, 뭡니까! 뻔할 뻔자가 아니었겠습니까. 파란 빛깔의 꿈의 새 한 마리는요, 두 날개를 활짝 펴더니만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리고 말았더랍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40일 내내 또 철야기도! 또 작정기도! “주여! 까불다가 이렇게 되었나이다. 이제는 지쳤고요, 목회인지 뭔지, 접을까요? 말까요? 응답해주소서, !”

 

사무엘이 ..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

호와 앞에서 찍어 쪼개니라.(삼상15:32,33)

 

기독교여.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구약성경이 아닙니까. 여호와의 영을 받은 구약의 선지자와 왕들의 대부분은 인간백정들이었으며, 착할 것 같았던 본문의 사무엘조차 아각을 토막 내고 말았습니다마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서슴없이 살인을 자행하곤 했었던 여호와의 그 충성꾼들 말입니다.

오히려 죽이라는데 안 죽였다고 해서 여호와는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고, 사울과 아합은 사람 안 죽이는 자비한(?) 짖을 살짝 했다가 호된 질타를 받았으며 끝내는 저주를 받고야 말았다는 구약성경의 그 살벌한 스토리 말입니다.

물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하셨으니, 까라면 까야지요. 죽이라면 죽여야지요. 여호와께 불순종을 했으니 천벌은 마땅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만일 그 명령자가 여호와가 아니라 예수였다면 그 이름도 역시 죽여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호와는 원수를 죽여라!”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합니까. 예수와 여호와와의 그 현저한 차별성 말입니다. 마치 여호와와 예수는 남남인 것처럼 어쩌면 그리도 충돌이 되는 것인지요, 나 원 참!

아시다시피, IS인지 뭔지 구약성경을 자기네의 경전으로도 삼고 있다는 무슬림들은 자기네의 원수를 마구 참수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래도, 그러나, 교인들만큼은 끝끝내 사랑을 하라? 그러다가 망하는 거 아닙니까? 비록 중들을 죽이지는 못 할지언정 절간에 숨어들어가 불을 쬐끔 질러준다거나, 넙데데한 부처 얼굴판에 뻘건 스프레이로 화장을 좀 해드린다거나, 어떻습니까? 근사합니까? 안 됩니까?

그렇다면 신부나 수녀들은요? 이단이 아니니 뜨겁게 사랑해야 된다고요? 하지만 세밀하게 따져볼라치면 그들도 분명히 이단이 아닙니까. 단지 거대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들을 이단으로부터 탈출시킨 그대가 아니겠는지요. 그리하여 기독교는 문선명과 이만희 등등의 조무래기들과만 아옹다옹하고 있고요.

한심한 그대여. 거대한 이단들에게는 타종교라는 빛나는 졸업장을 줘버린 기독교인 것이며, 큰 이단들과의 만남에서는 마치 절친이라도 만난 듯 히죽거리기까지 하는 그대의 그 이중성이 문제가 아닙니까. 하기는 같은 사람들이므로 빵 하나를 다정히 나눠 먹는다한들 좋고 말구요. 그러나 문제는, 그대 역시 저들과 똑같은 이단이어라! 교회의 영광을 버렸고 잡종교인 기독교로 스스로 전락을 해버렸으니 말입니다.

 

기독교여. 그대가 말하는 이단이란 도대체가 무엇? 예수에 대한 가장 큰 이단은 여호와 자체임을 정말로 모르겠는지요. 여호와 그 이름을, 그 말씀을, 육신이 되게 하사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신으로부터 영구히 제명을 시켜버리신 하나님의 그 창조의도를 왜 그대는 아직도 믿지를 못한다는 말입니까.

여호와는 이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원한 그 이름 예수에 대한 이단일 뿐입니다. 주님의 자기고발장인 구약성경으로써 여호와의 참혹한 정체성을 낱낱이 폭로하셨거니와, 진정한 창조인 주님 자신의 이름변경을 위한 성육신으로써 여호와적인 모든 것을 주님 자신으로부터 영구히 폐기해버리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그대는 여호와 이름을 아버지로 떠받드는 종교집단이기에, 그 이름의 모순점에 관해서는 언감생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열한 분위기입니다마는, 그것이 과연 참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믿으시는지요. 하나님의 뜻은 오직, 사탄과 인연이 깊었던 여호와 그 이름을 자신으로부터 영원히 없애기 위함이셨는데도 말입니다.

제발 생각을 좀 해보세요. 구약성경에서는 아무도 범접 못할 만큼 막강했었던 그 이름 여호와였었지만 예수부활의 신약성경은 왜? ? 그 여호와를 그토록 철저히 거부해버리고 말았을까요? 신약성경에 의해 완전히 폐기된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닙니까.

보십시오. 성경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하나님은 영원히 한 분뿐이시라는 그 영원한 진리 말입니다. 원명이 여호와이고 개명된 이름이 예수일 뿐, 여호와도 예수도 각각의 다른 두 하나님이 절대로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호와는 아버지이고 예수는 아들이고하는 그대의 정통교리는 영적인 착란일 뿐이며 사탄의 꼼수인 것입니다. 암요. 그대의 하나님은 이제와 영원히 오직 한 분뿐이시고 말구요.

물론 그대를 이해는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들 신이 자기보다 더 높은 여호와라는 아버지 신에게 기도한 듯 쓰여 있기에 당연히 그대는, “하나님은 좌우지간 둘! 성령까지 합이 셋!”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분명히 이사야서 96절 가라사대,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

이름은 ...... 영존하시는 아버지. (9:6)

기독교여. 본문 또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주시겠는지요. 아버지가 아기 예수이고, 예수가 아버지이고, 인간의 족보와 피조적인 육적질서를 초월하시는 참 하나님의 성경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진정 한 분뿐이라는 이 배타적인 성경적 진리 까닭에, 불교와 천주교 등등의 그 허접한 종교들과는 뚜렷하게 구분이 돼야 하는 그대이고요. 그런데 왜? ? 그 거룩한 정체성을 그대는 버렸더란 말입니까.

하지만 저는 굳게 믿사오니,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라는 이 영원한 진리로 말미암아 그대는 반드시 그 더러운 종교의 넝마를 벗게 되리라! 여호와 이름의 피 냄새나는 종교기독교로부터 신속히 탈출하리라! 주님의 신부인 참 교회가 꼭 되고야 말리라! 이러한 소망 탓에 무식한 촌놈 주제에 겁도 없이 떠벌이고 있거니와, 개신교란 본시 끊임없이 개혁을 지향했었던 위대한 유산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대는 개혁은커녕 귀머거리요 장님인 병신이 아니겠는지요. 정통교리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으며, 아집과 독선이며 도식화되어진 교리의 쇠사슬에 꽁꽁 묶여버리고 말았음! 그것은 대체 누구의 수작입니까.

그가 성령이시라면 몰라도, 그대를 청맹과니로 만든 자가 사탄이라면, 정녕 그렇다면, 그래도 그대는 악마의 교리 신봉자로서 끝내 주저앉고 말는지, 대답하라 그대여! 이제라도 벌떡 일어나 성경에 관한 생각다운 생각을 도저히 못 하겠는지, 대답하라 그대여! 간곡히 청하오니, 속히 돌아오시오, 참 성경이신 예수께로! 귀의하세요, 개혁정신에로! 대관절 무엇이 그대를 망설이게 합니까? 부요함에 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집착? 그것들은 모두 쓰레기일 뿐, 주님의 뜻은 결코 아니오니, 그 따위에 목을 매지 마소서, 제발!

 

목사님. 1986년을 끝으로 현란한 나의 꿈이여! 멋지게 날개 짓을 하면서 공중을 잠시 배회하더니만 끝내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지요. 목회를 결국 때려치웠지 뭡니까. “기분이 어땠냐고요?” 새벽기도 인도를 안 하니 좋았고, 교인들의 눈치를 안 보니 좋았습니다. 성령님이야 어찌 생각하든 말든, 내가 알 게 뭡니까! 금식과 철야기도의 일상이었건만, 한 마디의 말씀도 안 주셨던 비정하신 그런 하나님? 내가 알 게 뭡니까.

탄천 둑에 올라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제 일과였습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보였어야 말이지요. 들리는 것도 없것다, 뵈는 것도 없것다! 어찌 화풀이를 해야 할지 분통이 떠졌고, 아내에게 무지 미안했고요. 그러니 그게 그렇더라고요, 글쎄! 술 마시는 것들은 사람도 아니라고 욕을 하곤 했건만 그 눔의 술 말입니다.

에라, 모르것다!” 한 잔, 두 잔! 끝내는 한 병, 두 병! 미친놈처럼 고함을 질러대면서 말입니다. 지금이라면 민폐를 끼친다고 당장에 고소가 들어가겠지만 당시의 탄천은 엄청 조용했습니다. 하루 종일 냇가에 앉아 있을지라도 사람구경을 못할 만큼 보이나니 갈대숲 뿐! 들리나니 새소리 뿐! 장마철이면 팔뚝 크기의 붕언지 잉언지, 물 밖으로 펄떡 펄떡 잘도 뛰어오르곤 했었던 희한한 광경들까지!

아무튼 또 술 또 술! 내가 언제 목사였나 싶게시리 개판이었지 뭡니까. 아내는 배짝배짝 말라가고 있었고요. 먹고사는 문제가 아내의 어깨에 고스란히 얹히게 되었고 목사남편의 술값까지 챙겨야 했으니 왜 아니 그랬겠습니까. 엄청 쏘리! 지금도 미안!

그런데 형님. 목회를 접은 후. 두 해 겨울이 거지반 숨고르기에 들어가던 날들이었습니다. 잔설이 채 가시지도 않았던 그때에, 별일이 다 있었지 뭡니까. 까치들이며 만물들이 저에게 항상 말을 걸곤 하는 것 같았지 뭡니까. 사람도 아닌 것이! 미천한 것이! “너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야.” 등등, 무언가 저에게 전할 말이 있다는 듯, 만물들이 항상 저를 따라다니는 듯, 늘 그랬더랍니다. “안 믿어진다고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

탄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탄

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1:6,7)

기독교여. 본문을 과연 어찌 생각합니까. 이거야, ! 우리 사람들은 감히 여호와를 볼 수조차 없었건만, 사탄이 뭐 길래! 그 이름 여호와의 면전에까지 무상으로 출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에게 말대꾸까지 꼬박꼬박! 깐죽깐죽! 그러고 있었던, 그럴 수 있었던, 바로 그 악마 사탄 말입니다.

성경 가로되, “하나님이 부르지 않으면 그 앞에 나아갈 자가 없노라하셨건만, 그렇다면 도대체가 무엇? 여호와가 사탄을 불렀다는 거야, 뭐야? 말도 안 되는 본문이 아닙니까. 게다가 사탄의 요구에 따라 욥을 순순히 사탄에게 내주고 말았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이름 여호와의 그 이상한 정체성 말입니다.

만일 그대가 욥을 사랑한다면, “욥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시험하겠소.”라는 사탄의 참소에 대해, 그대 또한 여호와처럼 욥을 악마에게 후딱 내주고 말겠는지요. 오히려 당연히, “사탄아 꺼져!” 왜 안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너무도 수상한 여호와가 아닙니까. 그토록 자랑했었던 욥이었건만, 사탄의 포악함을 훤히 알고 있었건만, ? ? 그 악마에게 욥을 선 듯 내주고 말았을까요? 아니면 혹시 사탄이 욥에게 못쓸 짓을 할 줄을 모르셨나? 만일 몰랐다면 그 멍청한 여호와를 어찌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으리!

그렇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또 다른 방임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에덴동산에서도, 카인의 분기탱천 때에도 그러더니만! 도대체 여호와는 누구 편입니까? 사탄의 공격에 의해 욥이 겪을 수밖에 없는 그 혹독한 참상을 잘 알고 계셨건만, 욥을 악마에게 덥석 내주고 말았다는 여호와의 그 비정한 허락과 방임 말입니다.

뭐라고요? 갑절의 복을 받았으니 잘된 거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그대도 어디 한번 욥처럼 당해보구려. 갑절의 복이라며? 더욱 답답한 것은 늘 그러셨던 것처럼, 욥이 박살이 난 후 뒤늦게 나타나 고작 하셨던 여호와의 그 말씀들 말입니다.

욥의 당한 고통의 이유는 욥에게만 있다는 듯, 잘난 척을 엄청 늘어놓으며 책망만 하지 않았습니까. 암요. 여호와가 하나님이려면, 최소한도 저간의 경위이며 사탄 사이에 오갔던 일들을 솔직히 밝혀야 했을 텐데, 여호와는 사과는 고사하고 한 마디의 해명마저도 없지를 않았습니까. 예수는 모든 죄가 당신의 책임인 듯 홀로 십자가를 지셨건만, 예수와 여호와! 두 이름들 간의 도무지 좁혀질 없는 그 현저한 차이점 말입니다.

 

기독교여! 그러기에 묻사오니, 사탄이 밉지도 않소? 사탄이 더럽지도 않소? ? ? 그대는 교회됨을 버리고 종교가 됐다는 말입니까. 그 변절이 종교의 영인 사탄과의 영적인 간음임을 왜 모르는 것입니까. 여호와와 사탄과의 그 묘한 관련성 말입니다. 여호와의 어전회의와도 같았던 거기에 감히 사탄이 끼어있었다니요? 여호와와 그의 아들들만의 회동인 그 중대한 모임에 사탄이 떡하니 끼어있다는 기막힌 본문이 아닙니까.

또한 그 멍청한 여호와의 아들들 역시, “사탄아, 여기가 어디라고 네깐 것이 끼어들어!” 꼭 그래야 했건만 그들도 사탄을 거부하지도 않았거니와, 여호와가 먼저 사탄아, 욥같이 신실한 자가 어디에 있겠냐?”라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으신 듯, 사탄에게 대뜸 말을 섞고 있는 훼괴한 본문이 아닙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여호와가 사탄에게 자랑만 안 했더라도 욥은 그 큰 고통을 안 당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러나 일부로 사탄을 자극하기라도 하는 듯, 여호와가 먼저 사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는 너무나도 찝찝한 본문이 아니겠는지요. 하기는 워낙 속이 좋은 그대인지라 , 그 정도야!”이겠지만, 저로서는 결단코 묵과할 수 없고 말구요. 여호와의 그 수상쩍은 처사야말로 모든 재앙의 근본원인이겠으니 말입니다.

그대여. 욥기 2장에서도,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사탄을 약 올리려는 듯, 악마와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 또다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아닙니까. 인간 욥은 그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해야 했고요. 하여 대체 왜 그러셨는데?”라는 의문은 촌놈만의 과민함 탓이겠는지요. 그러나 안 해도 됐을 것 같았던 여호와의 질문 혹은 그 자랑 때문에 참혹한 재앙이 급기야 터지고 말지를 않았습니까. 욥의 아들딸들은 삽시간에 죽어버렸고, 아내마저도 자기 남편 욥을 저주하며 떠났고요.

더욱 씁쓸하게도, 욥을 파멸케 했었던 사탄에게는 한 마디의 책망도 안하셨던 그 이상한 여호와 말입니다. 물론 그대는, “너는 워낙 무식한 촌놈이라서 당연히 모르겠지만, 욥의 불신앙과 교만을 깨닫게 하셔서 갑절의 복을 주고자 그러셨던 거라니까!”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러니 그대도 욥처럼 당해보라니깐요. 그래도 그 한갓진 말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한번 당해보구려. 갑절의 복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그대이니 말입니다.

아무튼, 구약성경 처처에 신비의 함정을 파 놓으사, 성경언저리에서만 방황치 말고, “신비의 함정인 속 성경에 빠져 달라 곧 깨달아 달라! 주께서 여호와 적에는 왜? ?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꼭 이해해 달라!” 그리하시는 성경은, 참 성경은, 아버지 자신이신 주님의 그 피! 그 피눈물! 아닙니까? 촌놈만의 부질없는 애태움이겠는지요.

다만 입의 말로야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르든 예수라 부르든, 무에 다름이 있겠습니까. 말만의 호칭 따위는 예수나 여호와나 아무려면 어떻겠는지요. 오직 그대의 예배 안에 짙게 배어있는 여호와적인 그 종교질서 말입니다.

신은 높고 인간은 낮고, 홀로 높은 신에게 힘쓰고 애쓰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별 짓을 다해서라도 복을 받겠다는 그대의 기복주의 말입니다. 배반의 명수 선민들이 해왔었던 종교짓이며, 사탄도 천사장 적에 그랬었던 곧 하나님을 그대와는 다르다고 홀로만 높이, 주님과 인간 사이를 사실은 갈라놓고 있는 그 여호와적이요 구약적인 경배야말로 주님을 위하기보다는 차라리 참 하나님을 서럽게 외톨이 되시게 하는 죄, 죄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뻔뻔스럽게도, 생면부지의 전주에서 또 교회개척을 하게 될 줄이야! 3년 그랬나요? 그러나 그 눔의 혈기 말입니다. 어디에 숨었다가 필요(?)할 때만 되면 꼭 나타나곤 했는지, 울화통이 터졌고 말구요.

혈기마귀야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꺼져라!” 그러나 별무소용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짓이라고는 금식이나 철야뿐, 그 외에 또 뭐가 있었겠습니까. 결국 서울 북녘의 드높은 산 정상에로, 물병 몇 개만 달랑 들고서 비가 철철 내리던 밤에 기어오르게 되었지요. “주여! 제발 겸손, 겸손, 꼭 주세요. !”

5일 째 되던 날, 2시쯤이었습니다. 아니, 이게 웬 일! 별이 총총하던 방금 전의 밤이었건만, 갑자기 큰 흑암이 제 앞으로 확 밀려오는지 뭡니까. “이렇게 깜깜할 수가! 이게 대체 뭐지?” 얼마나 새까맣던지 눈앞에 손을 흔들어 봤지만 그조차 안보이더라고요, 글쎄! 온 산이 흑암 속에 침몰되어 있었던 그 밤의 그 큰 공포 말입니다.

깡다구 하면 너였잖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너무너무 무서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도망을 칠 수가 있나, 숨을 곳이 있나. 온 천지가 새까만 그 흑암에게 압살이라도 당한 듯 너무나도 끔찍했고요,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 뭡니까.

에이 빌어먹을! 몰라, 몰라! 잠이나 자지 뭐!” 눈을 질끈 감고서 팍 엎어져 잠을 청하게 되었고요, 깨어보니 날이 훤히 밝아 있었지 뭡니까. 내 자신에게 얼마나 화가 나던지. “어제 밤의 그 흑암? 분명히 마귀였으니 죽기로 싸워야 했는데!” 그 산에 더는 머물기가 징그러워 하산하고 말았지요. 몹시 참혹했었던 그때의 제 심정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 다윗을 감동시키사. (삼하24:1)

사탄이 . 다윗을 격동하여. (대상21:1)

기독교여. 그대의 공공의 적인 신천지 말입니다. 그 버러지들보다는 그들에 대해 허둥대고 있는 그대의 비참한 모습이 더욱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셨는지요. 교인들을 단속을 하느라 노심초사하고 있을 뿐, 그대의 모양도 어느새 그들을 점점 닮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대의 참담한 현주소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매우 조심스레 묻사오니, 신천지만 이단? 그대는요? 자유의 복음인 성경을 종교경전인양 받들어 봉독할 뿐만 아니라, 그 귀한 것을 온통 복 받는 비결로 오염시켜 놓은 그대가 아닙니까. 말이 좋아 개신교일 뿐, 개혁을 포기한지도 까마득한 옛 일이 됐사오니 똥파리가 똥 무더기에 꼬이듯, 구린내 나는 그대에게 온갖 잡것들이 꼬이는 것은 오히려 정상이라는 그 진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개혁만이 살 길이올시다. 그 누추한 정통교리를 개혁하지 않을 진데, 만만한 그대를 향해 신천지는 물론 불교니 천주교니 심지어는 무당과 점쟁이 따위의 온갖 잡것들이 군침을 삼킬 수 있었음이 저간의 사정이 아닙니까.

제발 생각해 주십시오. 이 무서운 본문을! 이 훼괴한 성경을! 본 성경은 한 사건의 두 기록으로서 여호와와 사탄을 동일시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오직 주어만! 위 성경은 여호와께서! 아래의 성경은 사탄이! 아닙니까? 촌놈의 눈이 혹시 삔 것은 아닐까요?

그대여. 본 성경의 처참한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저로써 몽매에도 바라는 것은, 기독교의 망함! 교회의 살아남! 종교인 기독교의 사라짐! 참된 교회의 부활! 일구월심 오직 그뿐이올시다. 물론 그대는, “내 밥줄 왜 끊어!”이겠지만, 대관절 언제까지나 모든 종교의 배후 조종자인 그 역겨운 사탄 놈에게 놀아나렵니까. 지금은 회개의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사오니 놓쳐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천연덕스럽게도 또 교단통합? 교단은 통합해서 뭐할 건데? 언제는 통합이 안 되서 그 난리였습니까. 참된 교회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를 않고, 내적이며 본질적 무엇의 성화만이 교회됨의 모든 것임을 그대 역시 잘 알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러므로 재림이니 종말이니 이단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그대의 치사한 그 정통교리 대신에, 성경책의 그 깊은 심연 속으로 이제라도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재림은 그대나 이단들의 교리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보십시오. 이 훼괴한 본문! 어쩌다가 그 지경까지! 성경기자의 실수? 그렇다면 몰라도, 성경의 원 저자 성령님의 의도된 진실이라면 말이 다르지를 않겠습니까? 물론 성서무오설이니 축자영감설이니, 무리가 있음을 저 또한 인정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류와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성경의 근간을 뒤집는 비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본 성경은 구속사 등등의 한담이기보다는, 차라리 피맺힌 절규이며, 그대에게 뭔가를 호소하시는 진짜 하나님의 처절한 비명이 아니겠는지요. ! 그대는 여호와를 예수의 아버지라고 똥고집을 부리지만, 욥기에서 누차 보았듯, 여호와의 면전에 멋대로 출입하던 그 사탄과 그대의 그 잘난 아버지 여호와를 동일시하는 본문이 아닙니까. 이 비참한 본문을 읽고 또 읽었을 텐데도, 그대는 여전히 똥폼 잡는 종교행사와 집짓기에만 몰두해 있고요.

 

기독교여. 한기총? 그게 대체 뭔 말의 약자입니까? 한심하고도 기똥찬 분들의 총본부? 자신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따가운 시선들이 있건만, 주도권 싸움에만 생난리들이 아닙니까. 엊그제는 폭력사태까지 났다면서요? 그럼요. 아무도 못 말리는 그 멎진 이름이여! 잘 빠졌도다! 과연 한기총답구려!

요컨대, 그대가 기독교로부터 벗어나, 무한 자유의 교회됨을 회복하지 못할찐대, 얼마든지 또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당연시 되어버린 교회세습이며 목회자의 타락과 현대판 카사노바 등등, 점입가경인 그런 일들이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본문은 주님의 피눈물로서, ? ? 여호와 그 이름, 그 말씀을 육신이 되게 하사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주님 자신의 통렬한 자기고발이올시다. 암요. 인간구원만을 위한 십자가가 결단코 아니었노라고 그대에게 호소하시는 그 주님의 처절한 자기고백이 바로 본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답답하게도 본문을 통해 사탄에 비견되는 그 비참한 여호와를 수도 없이 보면서도 끝끝내 구속사만을 고집하고 있는 그대, 돌 마음이여! 물론 예수의 보혈 공로 외에 그 무엇이 마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었으리! 하지만 성경에는 인간구원 그 이상의 심오한 의미가 있나니, 주님만을 위한 특이한 경륜이 없지 않고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 주를 욕하리이다.(2:4~5)

 

그대가 아버지라고 받들어 모시는 그 여호와에게 사탄은 끈덕지게 욥을 참소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사탄에게 순순히 욥을 내주었고요. 그러기에 여호와는 선한 목자? 그 무슨 우습지도 않는 농담입니까. 여호와와 맞먹는 사탄을 함부로 깐보는 그대의 담력(?)도 문제이지만, 사탄에게 참소나 당하는 그 비참한 여호와를 아버지로 받들고 있는 정신 나간 그 정통교리가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는지요.

맞습니다. 구약성경은 주님이 파놓은 신비의 함정이올시다. 그 속에서 긴긴 세월 내내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 주님을 꺼내달라고 곧 구약성경의 참혹한 그 신비를 깨달아 달라고 곧 그대더러 자신을 구원해 달라시는 하나님의 간곡함이 바로 구약성경인 것입니다. 암요. 주님은 인간의 구원자이시지만, 그대는 말고 참된 교회는 주님의 구원자올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본래성적인 그 뜻 말입니다.

성경 가로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이 과연 짝사랑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무릇 참 사랑이란 쌍방 간의 수평적이요 인격적인 그 지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자신들을 위해 은혜만을 탐내는 일방적인 그대의 종교성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이기보다는, 이기적인 집착에 불과하지 않겠는지요.

구원 자체인 참 사랑 말입니다. 하기는 작금에 이르러 돈 보따리가 구원의 모든 것이 되기는 했지만, 영원과 영혼의 존재를 믿는 참 성도들에게만큼은, 사랑하고 사랑 받는 참 사랑만한 구원도 없지를 않겠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주님은 그대를 사랑하는 자 곧 인간의 구원자이시며, 인간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할 자 곧 주님의 구원자가 바로 그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그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이제와 영원토록 아멘이고 말구요.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노라 큰 말을 했었던 유명 인사들의 그 누추한 추락이며 종교요 기독교의 구질구질한 그 결말이랄지, 어차피 그리될 밖에 없는 여호와 이름의 그 험난한 본색 곧 모든 종교의 피치 못할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무늬만 개신교일 뿐, 은근히 천주교를 동경하면서도 자칭 개혁교회입네 하고 있는 외식의 명수인 그대 말입니다. 아무거나 아멘? 아무 때나 할렐루야? 그 이름 여호와 탓에 사탄과 뒤얽혀버린 그 주님에 관한 참담한 본문이건만, 왜 그대는 계속 히죽거리는 것입니까? 실성했습니까? 아니라면 대체 왜 그러는데? 범사에 감사하라 했으니 순종하는 거라고요? 정말로 돌아버리겠군요. 성경의 그 거룩한 감사와 그대의 변형된 감사가 같으리라 여깁니까. 가령, 백화점 직원이 아무에게나 감사합니다!” 하는 것처럼, 속도 없고 영혼의 깊이도 없는 그대의 타락된 감사이며 사랑의 타락을 정녕 모른단 말입니까.

혹여, 맛도 향도 고소한 수미감자와 악취가 역겨운 썩은 감자의 차이만큼이나, 감사 많이 하면 큰 복 받는다는 기복주의적인 감사와 보혈의 내음 그윽한 신령과 진정 자체인 참 감사와의 극단적 차이조차 그대는 아직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까.

심히 안타까울찐저, 여호와를 쉽게 보면서 그 이름에게 연신 깐죽거리는 사탄이련만, 도무지 화조차 안내고 있는 그대이니 말입니다. 묻사오니, 그대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눈곱만치라도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사탄과 동격화 되어버린 본문의 주님은, 자신의 옛 이름 그 여호와 탓에 마귀에게 큰 모독을 받고 있건만, 그대는 왜? ?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른단 말입니까. 참으로 기똥찬 그대임에 틀림이 없지만, 더더욱 기똥차게도 하나님의 소망은 여전히 그대에게 있음을 어이하리.

이보시오. 가령, 개 한 마리가 그대의 밥상에 올라와 온통 엎질러 놓더니만 끝내는 그대의 밥그릇에 똥까지 퍼지게 싸서 뭉개놨다면 그대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몰라서 그런 것뿐이니 그 똥개가 여전히 자랑스럽고 예쁘다고?

본문의 사탄은 똥개보다 훨씬 더러운 악마로서, 그 놈과 한 자리에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주님은 큰 수모를 겪고 계신 것입니다. 항차 사탄이 감히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최악의 모욕이고 말구요. 옛 이름 여호와 때문에, 주님은 아직도 사탄의 간섭을 받고 있다는 이 원통한 진실 말입니다. 물론 그대는 알고 싶지도 않겠지만.

그대여. 여호와는 주님의 자존심 자체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 여호와는 욥에 대한 사탄의 참소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거니와, 그 여호와가 욥을 자랑했었다? 욥은 여호와의 상징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 관계성을 알면서도 욥에 대한 참소 곧 욥을 마치 여호와인양 우롱하고 있는 사탄인 것이며, 여호와와 사탄과의 그 징그러운 악연의 사슬 말입니다.

 

전엣 계명은 ..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7:18~19)

 

기독교여. 본문의 전엣 계명인 율법을 폐했다는 것은 주님의 승천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대는 승천을 마치 주님이 하늘 높이 피용 떠올라서 어디론 가로 휑하니 사라지는 로켓의 발사 광경처럼 연상을 합디다마는, 그보다 얼빠진 공상이 또 어디에 있겠는지요. 오직 주님의 승천은 영이요 생명에로만의 영원한 귀환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과 잇대어 있었던 그 여호와 곧 전엣 계명인 율법을 폐했음이야말로 진실로 통쾌했었던 하나님 자신의 대업의 성취였던 것이며, 놀라운 승리 자체 곧 승천이 아니겠습니까.

요컨대, 여호와 자체인 전엣 계명이요 율법을 폐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 이름을 영구히 없앴다는 것이며 이제 주님의 이름은 예수뿐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여 그대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여호와는 하나님은커녕 이제는 주님의 이름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암요. 여호와를 아버지로 받드는 그대의 예배의 대상은 참 하나님일 수가 결코 없는 것이며, 예수승천 후 곧 예수만이 하나님의 이름이 된 후, 그대의 종교예배를 받아먹는 영은 단지 사탄뿐이라는 이 끔찍한 진실을 그대는 과연 알고나 계신지요.

하기는 워낙 오랜 동안 종교예배에 길들여진 그대이므로 예수 이름만의 참된 자유예배가 얼마나 부담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 내내, 그대의 예배와 같은 따위를 받으셨던 적이 전혀 없으시지를 않았습니까. 신을 홀로 높이 받들어 모시는 그대의 종교예배는 예수님을 모독했었던 바리새인들의 전공이었고요.

깊이 생각해보세요. 홀로 높임을 받으며 수직적 질서의 종교예배를 받아먹는 자는 오로지 사탄뿐이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지금껏 그대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탄의 숭배자였었다고 하는 이 까무러칠만한 진실을 말입니다.

그대여. 입의 말로만 천번 만번 예수, 예수했다고 해서 그대 예배의 대상이 참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교활하기 그지없는 그 사탄 말입니다. 창세전, 종교인 그대는 말고 지금의 참 교회가 주님의 아내이듯, 사탄도 그랬던 것입니다. 욥기에서 보듯(1:6), 주님의 가장 내밀한 곳에까지 무단으로 출입을 할 수 있었을 만큼 여호와와 밀착돼 있었던 그러한 사탄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주님께서 여호와 그 이름, 그 특성, 그 율법을 육신이 되게 하신 바로 그 순간, 한때는 분명히 주님만의 속성이요 주님의 이름이었던 여호와적인 모든 것들은 사탄의 차지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남편이 죽으면 그의 모든 재산이 대부분 미망인에게 상속이 되는 것처럼 성육신과 동시에 여호와의 아내 격이었던 사탄에게, 여호와의 속성이 고스란히 넘어갔던 것입니다(4:6). 종교적인 예배이며 홀로 높임을 받는 하나님의 여호와적인 모든 특성 곧 그 이름이 말짱 사탄의 차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그대와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고 여기는 종교성의 예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셨던 것이며, 그 중대하다는 안식일조차 외면하셨던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말만으로 골백번 예수 어쩌고 그러할지라도, 그 중심이 여호와적인 종교심사일진데, 그대의 모든 예배는 사탄의 먹이가 되는 것뿐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 예수 이름의 선언적이며 심판적인 말씀이고요.

 

목사님. 참담한 심정으로 전주로 되돌아오고 말았지 뭡니까. 어렵사레 마련됐었던 전주에서의 목회마저도 때려치울 수밖에 없었고요, 겨우 몇몇의 가정과 함께 시골하고도 깡촌에 처박히고 말았습니다.

그럼요. 팔자에도 없는 농사를 다 지었지 뭡니까. 감자며 고구마, 고추와 복숭아, 오히려 좋더라고요. 그러나 아무도 못 말리는 기도의 고픔 말입니다. 금식이며 작정기도이며 그 지겨운 것들이 제 맘을 마구 땡기는 것을 어찌 하리! 그러기에 밤이면 밤마다, 쏴 돌아다니며 부르짖던 그런 거! 그렇게 세월을 낚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도 냇가에서 그러고 있었는데요, 기도한답시고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던 바로 내 앞에서 웬 시커먼 물체가 꿈틀꿈틀 움직이더니만 그야말로 귀신처럼 스으윽 일어나 앉는 거예요, 글쎄! 시커먼 빛깔의 험악한 낯짝이며 이글거리는 시퍼런 두 눈을 치어 뜨더니만, 잡아먹을 듯 무섭게 저를 노려보지 뭡니까.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요, 전만 같았어도 대경실색하여 나뒹굴고 말았을 텐데 오히려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 요 귀신 놈아! 나 겁줘서 기도 못하게 하려고? 웃기고 자빠졌네.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에 꺼져버려!” 그 귀신은 후다닥 사라져 버렸고요, 되게 싱거웠지 뭡니까. “뭐가 그따위 쪼다 귀신이 다 있노!”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

아 내 뒤로 물러가라. (16:22~23)

 

기독교여. 살짝 뜨악하다는 느낌이 안 드십니까? 방금 전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하시며 기뻐하셨는데, 베드로가 말을 약간 개념 없게 했다고 해서 돌연 확 삐지더니만 사탄아라고 심한 말씀을 하시다니! ? ? 체면도 없이, 예수답지 못하게도 버럭 화를 내셨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창세전 사탄의 배신 탓에 주님의 본질이요 그 이름은 절망과 분노의 영인 여호와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물질세상을 창조해야만 하셨으며, 사탄 없는 새 세상을 만들고자, “빛이 있으라!” 곧 영원한 말씀을 낳으셨다는 창세기 1장의 그 중대한 성경 말입니다. 그런데도, 원창조? 재창조? 장난이 지나치지 않습니까?

오로지, 절통하셨음! 고독하셨음!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노라!”라고 하셨던 고독한 주님의 그 처절하심이 지나간 한때의 투정이겠는지요. 오히려 지금! 종교이며 기독교요 사탄의 숭배자로 전락한 그대를 향한 주님의 그 슬프디 슬픈 탄식임을 그대는 왜 아직도 모른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버렸고 호적을 파내어 사탄에게로 옮기고 말았던 오직 그대에게, 토혈하듯 부르짖는 하나님의 그 처절한 소리, 소리! 그대더러 돌아와 달라 각혈하듯 호소하시는 그 비통한 소리, 소리!

무정한 기독교여, 그대의 귀에는 주님의 그 탄식소리가 들리지도 않는가! 하나님의 종말적인 그 외로움을 그대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 영혼과 영원에 관해서는 실상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가운데, 종교인 그대가 탐내는 것은 단지 세속적이요 정욕적인 그러한 것들 외에 무엇이 또 있다는 것입니까.

! 세상은 푹푹 썩어가고 있건만, 종교의 광대 춤에 몰두해 있는 그대 말입니다. 아무도 그 따위를 좋아하기는커녕 침조차 뱉음이 아닙니까. 썰물처럼 그대를 떠나고 있는 젊은이들하며, 그대는 이미 국민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건만, 기똥찬 그대는 여전히 그 지겨운 종교의 광대춤만을 추고 있지 않습니까. 하여 비통한 심정으로 간청하오니, 비록 늦었지만 아주 늦은 것은 아니오니, 이제라도 각성하여 돌아오라 예수께로! 죽이라 종교를! 참 교회를 위해 흙 한 삽 떠올릴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하고 말구요. 실패 또 실패! 끝내는 선민들에게마저 버림을 받았으며 구약성경 하나 가득 탄식만 남기고 있었던 그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새 이름 예수에 대한 피 빛깔의 처절한 꿈과 소망만을 남긴 채로 말라기를 끝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던 비련의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니었습니까.

예수 이름의 완성 곧 진정한 창조를 열망하면서 성경책의 뒤안길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그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예수 이름의 등장과 함께 흔적마저 묘연해지고 말았고, 신약성경에서는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여호와라는 단어는 물론이요 그 냄새조차 사라지고 말았던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닙니까.

그대여. 본문 성경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만일 사람 베드로에게 그러셨다면 굳이 화내실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의 분위기는 김새는 무드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사탄아?” ? ? 겉이 아니라 속을 보는 주님이셨기에, 베드로를 선동하던 원수 사탄을 보셨던 것이며 심히 분개하사 그 악마를 향해 심판의 호통을 치셨더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 얼마나 단호한 선포이며, 작심하사 외치셨던 사탄과의 결별선언이었던 것입니까.

아시다시피, 사탄은 예수 주변을 늘 맴돌고 있었지요. 주님을 넘보려 했었던 시험산에서도 완전히 주님을 떠났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요. 교활한 그 악마 놈을 얕잡아 보면 안 되고 말구요. 사탄의 음흉한 실력은 대단하기에 유다서 1장에서 분명히,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

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1:9)

기독교여. 주님의 면전에서 하와를 농락했다거나, 예수 바로 앞에서 유다에게 침투할 수 있었다거나, 엄청난 사탄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사탄의 선전관인 줄로 착각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그대에게는 사탄이 주인일지언정, 저에게는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을 정도로 치를 떨고 있으니 말입니다.

요컨대, 구약성경 내내 무언가를 준비하셨던 하나님이시며, 구약성경의 주체는 여호와인 듯 보이지만 그때도 역시 예수 이름의 새로운 질서였었노라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수직적이며 경직된 흐름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참 자유요 새로운 질서로써 옛 이름 옛 종교질서인 여호와를 서서히 해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욥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사탄이었건만,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던 그 여호와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탄만행의 근거인 여호와를 곧 주님의 옛 본질을 마침내 제거하시고자 율법이며 종교적인 모든 속성을 곧 여호와 자체인 그 말씀을, 죽음의 계명 아래에로 성육신시켰던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자체요 종교적인 모든 속성은 제거되었던 것이며 그것들은, 종교적인 모든 영들은 당연히 여호와의 미망인 사탄에게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거듭거듭 전하거니와, 입술의 말만으로써 천 번 만 번 주님을 여호와라 부르든, 야훼 혹은 예수라 칭하든 뭔 다름이 있겠습니까. 그대 영혼의 성화와 변질을 일으키는 그것은 입술의 말뿐인 신의 호칭이 아니라, 그대 마음 중심속의 하나님께 대한 신관! 그것이야말로 반드시 변해야할 시급한 당면과제가 아니겠습니까.

가령, 말로는 번번이 예수, 예수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성부, 성자, 성신, 신이 따로따로 셋이나 있다고 믿는 채로 게다가 그 신들은 자기와는 달리 홀로 높다고 믿는 종교적 신관일진데 그런 자는 예수를 믿는 게 결단코 아니고 말구요. 그러나 비록 말끝마다 여호와여, 야훼여라고 할지언정, 그의 영혼을 품고 있는 믿음의 본색이 유일신 신관으로써 한분이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고 있다면, 그 분은 마땅히 사탄 놈이 겁을 먹을 수밖에 없는 신의 경지까지 높여진 주님의 신부요 참 성도가 분명하지 않겠는지요.

요컨대, 십자가의 죽으심 까닭에 여호와 이름적인 상명하복의 종교요 수직적 질서이며, 경배하고 경배 받음의 종교적인 모든 것들이 곧 여호와 그 이름이 고스란히 그 이름의 미망인이요 제 일 상속자인 사탄의 차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대여. 성육신이며 십자가로써 꼭 없애야할 만큼, 여호와 자체이며 구약성경의 면면들은 고통의 피 냄새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만물조차 사랑으로 돌보셨던(12:24) 예수 이름과는 완전 다르게도, 짐승을 죽여서, 각을 뜨고 태워서, 그 시체의 연기를 식물로 흠향하셨던 주님의 옛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수많은 죽음들은 여호와 그 이름의 제거를 위한 응분의 값이 아니었겠습니까. 대홍수에서, 구약성경의 수많은 전쟁터와 제사들에서, 비명과 함께 죽어가던 피조물의 고통과 그 주검들 모조리, 여호와 이름의 영원폐기를 위한 필연적인 희생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죽어가며 쏟아냈었을 인간과 짐승의 피와 비명들! 사람의 죄 값이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구약 세월 내내 죽어가고 있었던 그 많은 시체들이며 제물들은 여호와 이름의 제거를 위한 그 대가가 아니었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영원퇴출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여호와 이름의 울분을 달래기 위한 그 희생들 말입니다.

! 주님에게서 여호와의 모든 것을 제거키 위해 최후의 제물이 됐었던 베들레헴 아기들의 처참한 죽음이랄지, 여호와의 멸절을 위해 주님은 그 어떤 희생도 마다치를 않으셨더라. 구약성경의 겉으로 표방된 것은 여호와 질서였었고 예수 이름은 속 성경으로 역사할 뿐이었지만, 큰 희생을 딛고 마침내 탄생된 대반전의 영원자유의 질서 곧 예수 말입니다.

 

기독교여. 안 보이던 여호와가 큰 희생을 딛고서 결국에는 보였던 인간예수의 영혼이 되었음이올시다. 구약 때와는 완전 거꾸로, 겉 예수와 속 여호와가 하나가 되셨는데 곧 성육신이며 공생애가 아닙니까. 새 이름 예수이며 참 자유의 완성을 위해 부활승천이 단행이 되었고요. 하여 예수가 승천하여 우주 너머의 그 어떤 별에 갔다가 또다시 보이도록 재림하리라 하는 그대의 정통교리는 단지 소설일 뿐입니다. 그 유치한 소설에 감동을 먹은 독자 몇몇이 자칭 재림주랍시고 난리도 아니고요.

하기는 이해를 합니다.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라고 기록되어 있기에 당연한 오해겠지만 예수 가로되,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무슨 뜻일까요. 그대의 기막힌 상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는 큰 충돌점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성경인 주님의 그 깊은 의중을 제대로 깨닫는 그것만이 한 점 남아있는 그대의 마지막 사명이 아니겠는지요.

그럼요. 젖내 폴폴 풍기는 그 치졸한 정통교리에 목을 매서는 안 됩니다. 철부지들의 그 저급한 수준으로부터 신속히 출애굽을 함으로써, “쭈시옵소서만을 일삼는 응석받이가 아니라, 주님과 혼인할 수 있는 신부다움의 완숙한 차원까지 자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시골생활도 벌써 16년이나 흐르고 있군요. 그 동안 별일들이 다 있었지만, 가장 거시기 했던 것은 역시 자식 놈이 아니었겠습니까. 어지간히 속을 썩였고요, 생난리들이 나기도 했고요. 가뜩이나 눈물이 많은 제 아내는 허구한 날 눈물바람이었습니다. 조폭에다거나 온갖 추문에다가, 문제들을 덤프트럭 째로 부어다주는 그 잘난 아들 놈 탓에 기도 하나는 실컷 하며 살았지 뭡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밤, 주일 밤으로 기억합니다마는, 몹시 피곤해서 곤히 잠에 취해 있었던 저에게 웬 못된 놈이 발길질을 하는 거예요, 글쎄! “빨리 일어나! 기도해야 된다니깐!” 당연히 퍼떡 깨어날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형님. 저를 깨우던 자들은 놀랍게도 천사였었노라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사도행전에나 나오는 얘기로만 알았는데, “실제로도 그렇구나!” 그 천사들은 어른이 아니라 자그마한 애들이었습니다. 짓궂게도 어르신을 걷어찬 후, 생글거리며 저를 내려다보던 아이 천사 둘! 귀엽고도 천진난만한 제 손자처럼 생겼었다고나 할까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14:12,15)

 

기독교여.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고백서이며 주님의 참회록이라고 한다면 제 말이 헛소리로 들리겠는지요. 창세전, 몸 없는 영들만의 영적세상의 그 누추한 비밀들 말입니다. 사실대로는 도저히 밝힐 수가 없기에, 그때의 무엇들을 보이는 인간의 역사를 빗대어 넌지시 들춰내고 있는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가끔 자신의 추잡한 과거를 숨기고자, 나의 비행을 마치 다른 이의 무엇인양 말하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영적인 소화력이 부족하므로 에녹의 무엇이라든가, 살렘 왕 멜기세덱이며 엘리야의 승천(?) 등등, 창세전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구약성경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괜한 오해를 할까 저어되시어, 성경의 원 저자 성령께서 매우 제한적으로 소개할 수밖에 없으셨던 창세전, 그때의 영들만의 영적인 사연들 말입니다.

암요. 다윗의 일생을 통해 첫 세상의 창피한 모습들을 폭로하고 있는 구약성경은 결코 종교경전은 아닌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말하는 그 창세전(1:4)’이며, 성경만이 창세기 이전적인 신비의 세상을 뚜렷하게 전하고 있음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대는 성경의 그 독특성에 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사오니, 진리를 알고자함에 있어서 그대만큼 게으른 집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유치한 정통교리 속에 무변광대의 진리를 가둬놓고 있는 그대의 오만함 말입니다. 게다가 범 교단이니, 통합이니, 탐욕을 벗지 않는 한, 되도 않을 그러한 일들 탓에 그대의 모양만 구겨지고 있음이 아닙니까. 세상은 그대에게 딱 어울리는 개독교라는 안성맞춤의 왕관을 씌워줬고요.

 

여호와의 화제 곧 그 하나님의 식물’. (21:6)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고전16:22)

본문이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는 여호와의 음식물 말입니다. 놀랍게도 짐승의 시체를 태워서 연기로 피워 올리는 죽음의 제사들이 아니었습니까. 동물들의 시체로 말미암은 연기 따위가 여호와의 식물이었거니와, 그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여호와 이름의 그 비참한 정체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이름은 육신이 되어 죽어야할 계명을 입고 있었기에, 그 이름의 식물 또한 짐승시체의 죽음의 기운이었노라 하는 이 섬뜩한 본문 성경의 신비 말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 영원한 본질 곧 예수이므로 그 이름의 음식 역시 본문에서 보듯, 영원히 변치 않는 생명이요 참 사랑이 아닙니까.

짐승의 시체인 죽음의 제사로서 여호와의 비참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는 본문인 것이며, 여호와 이름을 자신에게서 단호히 제거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역성혁명인 골고다의 십자가랄지, 우주의 본질적 변화를 위한 진짜 창조 곧 하나님 자신의 이름 바꾸기 말입니다. 그것이 정녕 경전이 아닌 성경만의 독특한 진리인 것입니다.

물론 인간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도 진리이고 말구요.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닌 것이며, 하나님만을 위한 보다 깊은 창조의도야말로 성경의 모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대! 주님을 사랑하노라 말은 하면서도 그대의 예배니 기도니, 종교성의 그것들 속에 과연 하나님만을 위한 참 사랑이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아시다시피, 말만의 호칭일진데 아무렴 어떻습니까. 입의 말이나 책의 글로나 주님을 예수라 부르든지 여호와라고 쓰든지 그 무슨 차이나 다름이 있겠습니까. 오직 내 믿음이 예수 이름 곧 참 사랑이며 하나 됨의 본질인지, 아니면 신은 따로 홀로 높고 사람인 자기는 따로 낮고 천하고 등등, 신과 따로따로의 낮은 신분의 자신은 그 높으신 신 밑에서 천국을 포함한 복을 받고 등등, 주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이분법적이요 이간질로서의 무엇이야말로 문제도 큰 문제가 아닙니까. 물론 예수적인 믿음 혹은 종교의 신 야훼적인 그런 믿음들 까닭에 진짜 천국과 가짜 천국이 영원히 갈라지는 것이고요.

아무튼, 쓸쓸이 홀로 된 분들의 그 간절한 소원 말입니다. 다정한 이를 재혼 그것 외의 그 무엇이 그분들의 절박한 소원이겠습니까.

 

기독교여. 그대의 주님은 몹시 고독한 홀아비올시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그대는, 주님과의 혼인은 생각지도 않는 가운데, 허구한 날 애들처럼 종교놀음이나 하고 있으니 홀아비이신 주님은 얼마나 속이 터지시겠습니까.

구약성경의 그 많은 제사들 말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셨던 그때에 왜? ? 죽은 제물을 바치라고 그토록 채근하셨을까요? 양이나 소 등등, 짐승을 죽이고, 피를 쏟고, 각을 뜨고, 그것을 연기가 훨훨 나도록 태우고, 그 시체의 연기를 식물로 흠향하셨다는 비참한 신비의 그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본문의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인 예수 때에는 여호와의 그러한 요구들이 일절 없어지고 말았으며, 오직 참 사랑만이 예수 이름의 음식이 아닙니까. 하여 구속사니 구원론이니, 그대만을 위한 이기적인 정통교리 대신에, “보다 깊은 성경의 참 뜻은 없을까?”하는 교회됨의 기본이며,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깊이 살피고자 하는 참 사랑의 도리를 신속히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그 끔찍했었던 볼라벤, 산바, 덴빈! 태풍 셋이 저희 마을을 관통 했었지 뭡니까. 웽웽거리던 그 굉음! 엄청났었던 그 위력! 말로만 듣던 태풍이, 그것도 셋씩이나 우리 마을을 휩쓸고 갔다니까요, 글쎄!

매년 실한 열매로써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기쁨을 주곤 했었던 대추나무며 매실나무며 뽑히고, 쓰러지고! “집이요?” 말도 마세요. 온 집의 천장들마다 왕창! 폭삭! “무언가 분명히 뜻이 있으시겠지!” 뇌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진짜 감사는 무슨!! 워낙 참혹하다 보니 꼭 저주를 받은 듯, 비통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형님. 낙심천만해 있었던 저에게 주님이 천국을 보여주셨지 뭡니까. “어땠냐고요?” 천국은 완전히 쓰리 의 차원이더라고요. 하얗고! 빛나고! 즐겁고! 솔직히 말해서 땅에서의 예배는 살짝 지겹고, 약간 힘겹고, 많이 부담되고, 그 역시 쓰리 의 수준이 아닙니까. 그러나 천국의 예배자들은 행복해서 그냥 죽더라고요. 주님은 보이는 형용이 아니셨고요, 밝고 찬란한 빛 자체!

저와 제 아내가 천국에 막 들어서던 그때, 그 찬란한 태양이 돌연 인간의 모습이 되시어 저희 앞에 확 다가오셨지 뭡니까! 그 밝음! 그 미소! 너무너무 반갑다는 듯,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듯, 저희를 꼭 안아주셨지 뭡니까.

그럼요! 영원히 잊지를 못하리라, 주님의 그 따뜻함을! 영원히 기억되리라, 성령님의 그 환한 미소가! 태풍 탓에 난리도 아니었었던 그때에, 만일 그 큰 은혜를 안주셨다면 저는 분명히 큰 시험에 빠지고 말았으리라! 그러니 더욱더 감사합니다! 유일신이신 성령님!

기독교여. 아직도 이 무식한 촌놈이 그대를 미혹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에게는 그럴만한 배움도 없거니와,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뭔 좋은 게 있다고 그 짓을 하겠습니까. 귀찮을 뿐일 텐데! 가능하다면 편안히 남겨진 생을 마치고 싶을 뿐입니다마는, 내 뒤에 남겨질 그대의 모양새가 이래서는 안 될 텐데 싶어서 못생긴 글이나마 몇 자 긁적일 뿐이 아니겠습니까.

요컨대, 여호와와 예수는 별개의 신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두 이름일 뿐이건만 어쩌면 그리도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두 이름 각각의 음식들 말입니다. 여호와는 죽은 것! 예수는 살아있는 것! 여호와 적에는 죽은 시체제물의 화제인 연기였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오니 그 음식 또한 영원한 것으로서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산제사의 산 제물인 참 사랑이 아닙니까.

대가를 노리는 종교성의 사랑이 아니오라, 영혼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순수한 진짜 사랑 말입니다. 월남 전쟁 때에 봤었던 죽어가던 병사의 염통으로부터 울컥울컥 솟쳐나던 붉디붉은 선혈처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대, 주님이 너무나도 보고파 자신 영혼의 영적인 심장으로부터 뜨겁게 뿜어 나오는 영혼의 피, 영적인 피눈물!

주님만을 향한 참 사랑이며 생의 궁극이요, 그것의 구체적인 열매인 참된 기도야말로 예수 이름이 그토록 바라시는 진찬이 아니겠습니까. 주님만을 위한 영원히 변치 않을 참 사랑의 그 순수한 고백 말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예수 이름의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잡수고 싶어 하시는 주님을 위한 음식인 것입니다. 영이시므로. 성령이시기에.

 

애굽에 ... 큰 호곡이 있었으니 .... 사망치 아

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12:30)

기독교여. 큰 슬픔을 딛고 감행됐었던 출애굽 말입니다. 바로의 교만 탓에 재앙은 필연이었지만, 아무 것도 모른 채 죽어갔었던 수많은 애기 장자들하며, 슬프디 슬펐을 그 엄마들의 통곡 또 통곡! 어찌 모른다 하겠습니까. 애굽 땅이라는 거대한 제단 위에 장자라는 시체제물들을 무수히 바쳤음! ! 제사가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거대하고도 음산했었던 죽음의 제사 곧 출애굽 말입니다. 여호와의 역작인 출애굽의 그 이면에는 큰 슬픔으로의 짙고도 음산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이름 여호와 가로되 출애굽을 대대로 기억되게 하라?” ? ? 그 처참한 시체제사를 왜 기억해야 하는 건데!

여호와 스스로는 엄청 자랑했었던 출애굽이지만,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그 큰 비극 말입니다. 어차피 그대의 정통교리와는 충돌할 뿐이오나, 그대는 진정 아는가? 주님의 피눈물 곧 신령의 장강을! 그대는 정녕 알고나 있는가? 여전히 멈추지도 못하는 채 계속 또 계속,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참 진리의 그 서러운 피눈물을! 주님의 상흔이건만, 그대에 의해 아버지라 불리는 그 이름 여호와에 얽혀있는 참혹한 그 신비를 말입니다.

비유컨대, 암 덩어리와도 같았던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니겠는지요. 그러기에 주님은 구약성경 내내 심히 고통스러워하셨더라. 보세요. 성경첫머리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는 주님의 그 상처, 그 병 곧 여호와 그 이름 까닭에 하나님은 심히 아파하시며 가라사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러기에 성경은 절대로 종교경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 여호와가 왜? ? 하나님의 이름일 수 없는지에 관한 주님의 자기고발장인 구약성경이 아니겠습니까. 복 받는 비결서는 결코 아니고요. 다만 젖이나 먹는 그대가 젖을 떼고 단단한 음식을 먹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음! 주님의 병적인 그 이름 여호와를 너무 일찍 밝혔다가는 그대에게 탈이 날까 염려가 되셔서 말입니다.

하기는 그대의 마음을 이해는 합니다. 가령, “이 촌놈아! 우리 중에는 유식한 박사들이 쌔고 쌨는데, 하나님이 하필이면 무식한 너 따위에게 진리인지 뭔지를 줬겠냐?” 그럼요. 저라고 왜 의심이 안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내 기도는 오직, “진짜 하나님! 나를 요렇게 만든 것이 주님이 맞기는 맞습니까? 변변치 못한 이 촌놈을 버리지 말아 주소서, 제발!”

 

목사님. 어느 날 논길을 걷고 있었는데요, 웬 여자가 자기보다 더 큰 어른 남자를 들쳐 업고서 아주 힘겹게 밭일하고 있더라고요, 글쎄! “거 참, 이상한 자들도 다 있구만!” 집에 와 아내에게 물어봤지요. “혹시 얼마 전에 부부가 함께 죽은 집이 있어?” 남자가 먼저 죽은 후 몇 일만에, 그의 아내 역시 어떤 자의 운전미숙 때문에, 바로 고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거예요, 글쎄!

그 불쌍한 여인의 남편이었다는 자는 팽팽 놀고먹으면서 자기 아내에게 평생을 업혀 살다시피 했다나, 뭐라나! 그러니 여자가 남자를 업고 있는 흉한 꼬락서니의 귀신들이 되어 그렇게 다니고 있었지 뭡니까.

그런데 형님. 사나흘 후, 마침 밤중에 제 아내와 함께 바로 그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요, 낮에 봤었던 그 귀신들이 안 보이는지 뭡니까, 글쎄! 또 아내에게 물어봤지요. “여기서 죽었다는 그 여자 말이야, 밤이 아니라 혹시 대낮에 죽지를 않았어?” “그래요. 낮에 밭일을 하다가 변을 당했대요.” “, 그렇구나! 귀신들은 자기의 죽은 장소와 죽은 시간에 대해서 되게 집착들을 하는구나!” , 그런 거 말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 너희

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6:37,38)

기독교여. 본문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여호와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예수가 아닙니까. 만나를 주실 때는 사람에게 묻고 자시고도 없이 독단적이셨지만,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만일 사람에게 떡이 없어서 내놓지를 못했다거나, 다섯에서 하나 모자란 네 개밖에 내놓을 수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기적이 아예 없었거나 또는 모자란 기적뿐이었거나, 혹 그렇지는 않았을지!

왜 아니었겠습니까? 기적을 위해 오병이어가 필요했다는 그대의 마중물 논리이기보다는, 주님께서 인간과의 협동을 원하셨다는 몹시 충격적인 본 사건은, 여호와를 버리고 예수이름을 향한 주님 자신의 대 전환이며 새 질서 확립을 위한 그 뚜렷한 증표가 아니겠는지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여호와와는 달리, 만일 그때에 오병이어를 내놓는 사람의 협력이 없었다면 예수이름의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안하셨으리라.

당연하고 말구요. 아기예수는 똥기저귀를 스스로 갈아 찼음도 아니며, 씻고 입고, 먹고 마시고! 그 모든 것을 아기예수가 직접 해결했음이 아니라, ‘사람엄마의 손을 빌렸고, 순전히 사람의 손에 의해 키워졌으며, 철저히 사람의 협력을 받으셨던 그 이름 예수 곧 새 질서의 하나님 말입니다. 이제 주님은 사람의 협력이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십니다. 아니, 안하십니다. 여호와와 예수! 두 이름 간의 그 큰 차이점 말입니다.

물론 십자가에 달리심도 자기가 자기에게 못을 박았음이 아니오라, 다만 사람로마인들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당신의 시신장례도 오직 사람에 의해! ‘사람의 협력이 필수이도록 자신을 낮추셨거니와, 신적인 권능을 사람됨의 그 속에 낮춰버리신 예수이름의 새 질서 말입니다. 사탄의 존재근거인 여호와를 버리고자, 여호와요 종교질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 사탄이므로 그 악마는 흉내조차 낼 수 없도록 진정한 창조 자체요 참 사람이 되셨던 것이 아닙니까.

암요. ‘사람과의 협동으로써만 신기원의 세계를 완성코자 사람이 되셨는데 성육신이고 말구요. 따라서 성육신은 성경만의 의미인 종교적인 겸손을 넘어, 여호와에서 예수로의 이름 바꾸기인 진짜 창조를 이루고자, 피조물 사탄은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오직 창조자만이 하실 수 있었던 전혀 새로운 창조로서의 성육신이 아니겠는지요.

그렇습니다. 예수의 겸손은 중과 신부도 하고 있는 종교의 양태가 아닙니다. 겉모습은 같으나, 예수의 낮아짐은 주님 자신의 이름 바꾸기 곧 하나님의 자기 혁신이요 진짜 창조를 위한 그 놀라운 신비의 결행이었던 것입니다.

홀로 높으셨던 여호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여호와요 종교의 높음뿐인 사탄은 모방조차 할 수 없었던 주님만의 본질적인 자기 낮추심! 실로 단호한 성육신이 아닙니까. 인간의 보편적 삶의 모든 것을 주님 자신의 본질 곧 자기이름으로 자취하셨거니와, 물론 대속의 제물임과 동시에, 피조물 사탄은 꿈도 꿀 수 없는 창조자만의 창조가 아닙니까. 하여 새 이름이며 새 질서의 창조를 위한 첫 번 성탄절은, 주님의 존재적인 자기변신 곧 자기 이름 바꾸기이었으며 진정한 창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대여. 주님의 창조의도는 사탄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라고 드렸거니와, 여호와적인 홀로 높음의 수직적이요 종교질서만을 상속받은 사탄이 아닙니까. 하여 놈이 영원히 넘볼 수 없는 평등과 자유의 질서이신 그 이름 예수의 완성을 위해 곧 사탄의 접근이 아예 불가능하도록, 차원적으로 사탄과 영원히 분리되도록, 홀로 높았던 여호와의 본질과는 영원히 다르도록, 낮고 천함이며 평등과 자유의 차원으로 성육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청하오니 그대여. ‘사람의 도움이 절실한 참 사람이신 주님을 널리 영접해 주시게나, 제발! 부디 옷섶을 풀고서 낮고 천함 자체이시며, 우리 사람과 동격이 되어버리신 그대의 사랑 참 하나님을 따듯한 품으로 꼭 보듬어주시게나, 제발!

 

목사님. 세상에, 세상에, 그가 나를 떠나다니요! 모두가 떠날지언정 그만은 내 평생의 튼실한 버팀목이 되리라 믿었건만, 온갖 모함과 이간질까지 하면서 그가 우리를 떠났지 뭡니까. 자기는 버릴 자를 버렸고, 떠날 곳을 떠난 것뿐이라고 온갖 회칠을 하면서 우리로부터 등을 지고 말았습니다.

기분이 어땠냐고요?” 땅이 꺼진 듯 했다면 혹 답이 되겠는지요.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 저와 다정히 담소를 나눴거든요. 그랬던 그가 떠날 줄이야! 생애적인 아픔이었다고나 할까요. 떠난 후로도 그는 남은 이들에게 저를 버리라고, 빨리 떠나라고, 두 해에 걸쳐서 계속 꼬드겼다나 뭐라나! 제 아내는 점점 피폐해져 갔고요, 저 또한 너무 아팠음! 쓰렸음! 울었음! 탄식이 기도였고 한숨이 노래였었습니다. 그런데 형님. 그러기를 몇 년 후, 진짜 감사가 태동이 됐다면 과연 믿어지겠는지요.

성령님! 그분들 덕택에, 그들을 쓰셔서, 감춰져 있었던 내 영혼의 죄를 깨닫게 하여주셨고 회개케 하셨사오니, 성령님 감사합니다. 모쪼록 떠나간 그들을 긍휼히 여겨주소서. 오고감에 복을 주시며, 영생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 함께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22:45)

기독교여. 유태인들의 종교적인 신관과 그 이름 예수와의 갈등 말입니다. 저들의 것은 여호와 이름만의 종교적인 신관이었고 예수는 평등과 자유의 생명이었기에 둘 사이의 충돌은 필연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종교이며 여호와적인 것들을 제거하고자 물질을 창조하셨던 바로 그때, 이미 예견됐던 충돌이었으며 예수승리는 확정된 것이었지만 그 승리를 향한 예수 이름의 그 답답한 승리방식말입니다.

져서 이김! 죽어 살아남!” 이 역설적인 승리질서를 따라 예수는 십자가에서 고개를 떨구셨고 유태인들은 이겼노라 까불었지만, 사탄에게 넘겨진 여호와적인 신관으로는 전혀 납득이 될 수 없었던 예수 이름의 그 승리방식 곧 십자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만, 사탄과의 영원분리를 위한 하나님의 승리방식인 것입니다. 주님의 옛 본질 옛 이름 그 여호와를 영원히 없애기 위해, 사탄에게는 영원히 없고 주님에게만 있는 그 이름 예수에로만의 이름 바꾸기였었던 성육신이며 십자가의 본래성적인 그 의미가 아닙니까. 그러나 답답할찐저, 그대는 여전히 시간과 공간이라는 그 드센 피조성의 억압 아래 놓여있는 종교 관념의 포로가 아니겠는지요. 예수가 어디서 나셨고 언제 탄생했느냐 등등, 시공의 제한성에 묶여 있는 성지순례라는 그 물건 말입니다.

가령, 그대의 성지는 예루살렘인데 이슬람교와 겹치기 까닭에 늘 긴장 속에 놓여있다는 그 허접한 종교성입니다마는, 그렇고 말구요. 그대로부터 예수의 평등이며 자유의 생명적 질서는 소리 소문도 없이 실종되고 말았으며, 시간과 공간의 그 너절한 영적기세 아래에 어느덧 예속되어버린 그대! 종교로서의 부끄러운 그대의 민낯이 아닙니까.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14:30~31)

 

기독교여. 피조물 사탄이 감히 주님과 맞먹으려 했다거나, 시험했다거나, 그것들은 오히려 사탄에 대한 주님의 방임이셨으며, 그 악마와의 관련을 끊고자 단호한 결단을 내리셨는데 그것이 정녕 성육신이 아닙니까.

베들레헴 인근의 수많은 애기들의 죽음을 담보하고야 예수이름의 출발이 비로소 가능했었을 정도로 사탄의 훼방은 실로 대단했었으며, 여호와 이름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 한에는 그 이름에 기생하는 악마의 참소를 도저히 끊을 수가 없기에 마침내 내릴 수밖에 없었던 창조자만의 창조주다운 결단 곧 성육신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창세전, 여호와는 사탄의 전신 루시엘이요 빛의 천사에게 그대의 그것과 똑같은 종교예배를 통해 홀로 높임을 받고 있었고, 그것이 채무가 되어 욥기를 통해 알 수가 있듯, 사탄의 핍근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채무자요 여호와가 되셨던 것입니다. 힘 한번 못써보고 채권자 사탄에게 욥을 내줘야했고요.

그러므로 본문의 선포! 그게 어디 예사로운 말씀이겠습니까. 성경글자만의 의미로는 대수롭지 않은 본문인 것 같지만, 본 말씀은 진정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외치고 싶으셨던 그 대망의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창조자만의 창조적인 대 선언 말입니다. 흔히들 없던 것을 있게 하는 물질의 만듦만을 창조라고 합니다마는, 물질의 헛됨보다야 암요, 하나님 자신의 이름 바꾸기! 그것만이 온전한 창조가 아니겠습니까.

여호와로부터 예수 이름에로의 주님 자신의 존재적인 자기변신 말입니다. 욥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지성소마저 쉽게 범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하듯 그의 형상인 인간들을 마구 참소하던 사탄이 아닙니까. 따라서 놈의 접근을 막기는커녕 사탄의 활동근거일 뿐인 자신의 옛 이름 여호와가 주님은 몹시 싫으셨을 밖에요.

그리하여 사탄의 접근을 영구히 차단코자, 놈의 기반이며 홀로 높음의 종교질서인 여호와 그 이름 버리기! 예수로의 이름 바꾸기! 주님 자신의 이름이요 본질 바꾸기인 새 창조로써 사탄의 접근이 영원히 차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기변신이 마침내 실행되었나니, 성육신이 아닙니까. 예수 안에서만 인간의 구원도 보장되는 것이고요.

! “여호와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어림도 없고 말구요. 오직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선포할 수 있도록, 주님 친히 존재적 자기변신인 성육신을 이루셨거니와, 그 대업으로 인한 승리의 확인이 바로 본문이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제 아내가 갑자기 마구 하혈을 하는 거예요, 글쎄! 자궁에 물혹이 여럿 생겼다나, 뭐라나. 수술 날짜를 받아놨지요. “기도요?” 기도는 무슨!! “하나님! 정말 이럴 겁니까? 주님만 믿고 여태껏 버텨왔건만 꼭 이래야만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우리 부부를 죽여주세요, 제발!”

바로 그때였습니다. 커다란 독사 뱀 한 마리가 내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지 뭡니까. 얼마나 징그럽던지, 얼마나 끔찍하던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쫓아낼 생각이 영 안 들더라고요, 글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지요. 그 놈의 독사뱀 말입니다. 시커먼 때깔에다가 대가리는 삼각형! 예의 그 마귀였지 뭡니까.

그 악마가 슬슬 어깨까지 기어 올라왔었고, 머리통을 물어뜯겠다고 아가리를 쩍 벌렸고요, 이제 막 물어뜯으려는 그 찰나!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지 뭡니까. 냅다 소리를 질렀지요. “마귀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꺼져버려!” 그 뱀 곧 마귀는 사라졌지만, 그때야 퍼떡 떠올랐던 생각! “맞아! 마귀의 먹이는 불평이야! 성령님 죄송합니다. 정말로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 나의 하

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15:34)

 

기독교여. 이 무슨 뜬금없는 불평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이면서, 누가 누구를 버린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당신 외에 또 있기라도 하다는 듯, 예수는 아들이고 아버지는 위에 있고, 성신이 또 있고, 마치 신이 셋이나 있다는 듯, 혼란을 조장하는 그 까닭이 대관절 무엇? 삼위일체라는 그 요상한 물건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령, 여호와 그 이름 곧 그 말씀이 사람 요셉의 대신에 이 되어 사람 마리아의 난자와 결합이 되었고, 그녀의 자궁에 착상되었음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됐다지만, 마리아가 만삭의 몸으로 베들레헴에 갔다는 둥, 애초부터 말씀이 장성한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결코 아니고요.

매우 생경하게 들리겠지만, 여호와 이름 곧 말씀이 정자가 됐으며 엄마의 탯줄을 통해 자양분을 먹으며 열 달 후, 사람애기로 탄생되셨음! ! 보였던 예수의 안 보이는 영혼은 여호와였던 것이며, 마리아의 태를 통해 공급됐었던 곧 예수의 몸과 피는 당연히 먹고 마셔서 사람 우리들의 몸과 피도 되어진 그 음식물 곧 만물이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2:52).” 사람의 그것과 똑같은 음식물을 먹고 마시면서 그것이 예수의 몸이 되었기에, 보혈 또한 특별한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피와 같은 피였을 뿐이며, 주님의 살 또한 우리와 똑같은 살이었노라 하는 진실로, 진실로,이 어마어마한 새 창조의 신비 말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 역시 우리의 그것과 다름이 없기에, 그분은 진정 우리 똑같은 사람이신 것이에요.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아프심 또한 우리와 같았다고 하는 그 아픔의 신비 말입니다. 십자가 주님의 그 고통은 살짝 칼에 베여도 아파서 쩔쩔 매야하는 우리들의 그것보다 훨씬 훨씬 더했사오니, 십자가의 예수는 고통 자체! 아픔 자체! ? ? 의도적으로 우리와 똑같은 몸이 되셨음으로! 성육신은 엄연한 현실이었음으로! 안 보였던 신비적 아프심의 보였었던 현실화가 말씀의 성육신 곧 사람 되셨음이므로!

 

기독교여.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사람 되심은 옛 차원들의 혁파였으며, 차원들 곧 여호와의 보좌였으며 사탄이 들락거릴 수 있었던 옛 하늘들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까. 3차원이니, 4차원이니, 옛 차원이요 옛 하늘들에 관한 공격이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신기원적 차원의 새 창조를 위한 최후의 단계였었던 그 성육신 말입니다.

인간이면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끔찍한 그 숙명 곧 늙음과 죽음의 원인자이며, 그것의 권세 자체인 시간이요 사망말입니다.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주님의 성육신이 아니겠습니까(고전15:26).

!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6).” 늙음과 죽음을 운명처럼 여기는 모든 종교에 대한 주님의 철저한 배척이셨으며, 최대의 영물인 시간에 대한 창조자의 돌격 곧 성육신 말입니다. 비록 사망이요 시간의 권세는 여전히 굉장치도 않지만, 그것에 대한 현실적 심판이 마침내 시작이 됐나니, 성육신이 아닙니까.

종교의 한계성인 그 옛 이름 여호와에 대한 영원한 포기이셨으며, 죽음의 공포이며 사탄 자체인 그 시간 권세로부터 인간 모두를 해방시키셨음! 모든 종교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영원자유를 향한 대도약을 가능케 하여 주셨음! 그것이 정녕 성육신의 신비이며 참 승리를 위한 영원한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대여. 여호와 자체인 사람예수의 영혼과, ‘사람엄마의 헌신과, 주님의 보이는 몸이 되었던 만물 곧 음식물들! 이 삼자의 결합으로써 예수이름이 완성됐다는 이 어마어마한 신비 말입니다. 물론 그대의 교리와는 충돌이 되겠지만, “여호와 플러스 만물 플러스 사람의 수고곧 본문의 유일신 예수께서 자기를 버린다고 불평을 하다니요! ? ?

아시는 것처럼, 여호와가 아버지는 무슨!! 주님의 옛 이름일 뿐이며, 그대와 모든 종교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러나 새 이름 예수의 창조를 위해 하나님의 옛 말씀, 옛 이름 곧 여호와는 육신이 될 수밖에 없었고, 폐기되는 본문의 그 순간, 그 이름은 왜 아니 참담 했겠습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여호와니 예수니, 하나님의 아들들(1:6) 혹은 하늘들(68:33)이라 불리는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과는 달리 나름 나름의 인격체올시다. 하여 예수의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 예수로서 중생 곧 부활은 됐지만, 왕 중 왕이요 홀로만의 높음으로부터 도태되고 있는 본문의 그 순간 곧 죽어가던 그때! 여호와 이름은 왜 아니 서러웠겠습니까.

요컨대, 여호와나 예수나 따로따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름들일 뿐이지만, 각각의 이름들은 인격의 삼 요소를 지닌 신비의 실존 곧 주님의 아들인 것이며 그러므로 본문 성경은 버림받는 인격체 그 여호와의 인격적 비탄이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여. 여호와 이름은 본문처럼의 절망의 본색임과 동시에, 또한 꿈과 소망의 복합성적인 인격체인 것을 아시는지요. 그러나 사람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하셨던 그 뚜렷한 다름의 선언적인 질문 말입니다.

홀로 행하셨던 여호와 때와는 달리, 사람에게 협조를 구했고 사람과의 연합을 통해서만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너희에게 떡이 몇 개?”라고 사람에게 손을 내미셨다는 그 말씀은, 암요! 자신의 이름 바꾸기를 위한 창조주의 자기혁신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은, 본질은, 속성은 이제와 영원히 오직 예수뿐이고요.

따라서 종교의 이름 여호와를 안 버린다면, 그대의 임금은 예수가 아니라 종교의 마왕 사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입술의 말로야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르든, 예수라 부르든 무에 다름이 있겠습니까. 단지 그대의 예배에 짙게 배어있는 여호와적인 종교질서야말로 신속히 버려야할 사탄 자체인 것입니다. ? ? 이미 언급했듯이 성육신 바로 그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제거가 되었으며 그 후, 여호와요 하나님의 옛 이름인 종교적인 모든 속성들은 사탄의 차지가 됐기 때문입니다(4:6).

그러기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절망의 이름이었지만 꿈과 소망의 본질이기도 했었던 여호와 그 이름, 그 아들, 그 하늘의 쓸쓸한 퇴장이 아니겠는지요. 사탄 대신에 인간과만 하나가 되기를 곧 사탄으로부터의 영원한 자유를 사모하면서 쓸쓸히 물러나고 있었던 그 이름 여호와의 마지막 비탄 말입니다.

비록 신약성경에서는 흔적조차 찾을 수없는 하나님의 옛 이름, 옛 아들, 여호와이지만 예수 이름의 부활과 함께 여호와 역시 훨씬 장엄한 이름으로 중생하게 되었고, 예수 이름의 면류관이 되어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로서 다시금 그 실존이 영원토록 존재하게 되었더라. 아멘! 보이는 겉 부활의 안 보였었던 속 부활 말입니다.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2:2,3)

 

기독교여. 그대가 거룩하다고 정해놓은 주일이며 일곱째 날은 숫자의 셈법이 아니라 인격적 실체인 것을 아시는지요. 만일 숫자 7이라면 그것은 무생명체이기에 생명의 주님이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도 없었거니와, 복을 받았다면 일곱째 날 역시 복을 받고 안 받고의 의지를 지닌 인격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위해 준비된 곧 복을 받은, 일곱 수의 의미를 지닌 대단한 영물들이며 천사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예비 되었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 특별한 천사들 말입니다. 예수 재림을 위해 지금껏 감춰져 왔었으며,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에서의 그 천사장 그룹이 바로 일곱째 날의 천사들이올시다.

! 주님의 재림은 영이요 생명 곧 안 보이는 영적 재림인 것이며, 그대가 기다리는 육적 재림은 만화일 뿐입니다. 딱 한 번(9:28) 속죄제물이 되고자 보이도록 오셨을 뿐, 두 번 다시는 보이는 피조 모습이 돼야할 이유가 전혀 없고, 영원히 없으신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의 곧 참 사람다우심의 영광스러운 귀환 곧 승천이 아닙니까.

하기는 이 촌놈에 대해 너는 분명히 이단이야!"이겠지만, 이단은 차라리 그대의 전공이 아니겠습니까. 간곡히 청하오니, 주님께 대한 배신일 뿐인 종교 행위를 즉시 중단하고서, 이단 짓을 중단하고서, 성경책 속의 안 보이는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지 않겠는지요. 성경이라는 신비의 언저리에서만 맴돌지 말고 말입니다.

보십시오. 그대의 언행심사들 중에 종교가 아닌 것이 과연 하나라도 있습니까. 그 귀한 예배마저도 복 받는 종교의 장으로 변질시켜버렸고, 천국조차 여타 종교들의 사후개념처럼 세속적인 복의 연장으로 종교화 시켜놓지를 않았습니까.

 

목사님. 물론 이 아우의 얘기가 허황되게 들리겠습니다마는, 기도 중에 잠시 쉬고 있었는데요, 어마어마한 뱀 두 마리가 지구를 통째로 뚤뚤 감고 있는 겁나는 환상인지 뭔지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지 뭡니까.

새까만 빛깔의 거대하고도 그 무시무시했었던 뱀 두 마리 말입니다. 서로서로의 몸뚱어리를 연락 지어놓고는, 절대로 안 떨어지겠다는 듯, 강하게 밀착돼 있었고요. 그 뱀들의 싸나운 눈깔들하며, 지구를 당장에 으스러뜨리고 말겠다는 듯, 그 뱀들은요 강력한 조임으로 지구 전체를 챙챙 감고 있는 것 같았지 뭡니까.

형님. 절대로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 예시적인 무엇인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튼, 기도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구요. 요즘의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가 결코 범상치가 않지를 않습니까. 혹시 말로 못할 사악한 짓들이며, 온갖 끔찍한 타락이 이 땅을 뒤덮게 돼지는 않으려는지요. 가득이나 요 꼬락서니인데, 이거야 원! 걱정이 돼서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32)

 

기독교여. 아시다시피, 문화적인 강림 곧 성경의 의도는 다만 여호와 버리기에 있음이 아닙니까. 주님 자신으로부터 사탄과 연락이 됐었던 그 이름 여호와를 버리시고자, 하나님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셨지요. 여호와를 제거함으로서 사탄으로부터 영원히 자유, 자유, 하시려고 구약성경 내내 주님은 그토록 아파하셨고요.

여호와의 홀로방식이 아니라, 인간과의 하나 됨의 차원 곧 예수 이름의 완성을 위해 그토록 아파하셨음이 아닙니까. 주님의 동역자요 신부인 교회를 창립하고자 그렇게 말입니다. 하여 그대가 만일 주님을 위한 진리의 깨달음 곧 주님의 신부됨을 버리고 동역자임을 배신한다면 주님은 아무 일도 심지어는 재림조차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 ? 이제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음의 여호와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함의 예수이시므로!

그러기에 그대여. 신천지와 뒤엉켜 개싸움을 벌릴 것이 아니라, 그들과는 다른 곧 주님의 신부요 동지이며 교회됨의 본분인 진리의 그 터득을 위해 마침내 일어나야하지 않겠는지요. 가령, 기독교가 죽고 또 죽어 무덤이 되어, 그 무덤 위에 발그레 피어나는 들꽃처럼, 시체종교가 아니라 영원자유로의 발 돋음인 그대의 참된 사명 말입니다.

보이는 우상만 우상이겠습니까. 정통교리 역시 영적인 우상이요 시체종교의 시체임금이건만, 일곱째 날을 숫자의 개념으로만 우기면서 주일이니 뭐니, 예수는 전혀 상관도 안하셨던 그 허망한 날들을 지키느라고 오늘도 부산스러운 그대가 아닙니까. 간청하오니, 그대와는 달리 주님을 편히 모시던 에스겔서의 그 네 생물들 곧 일곱째 날의 천사들과 비슷하게라도 성화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성경글자들 안에서만 술래잡기를 즐기는 그대이오니, 이 촌놈이 천사숭배자라고 또다시 종교놀이를 하고 싶겠지요. 그러나 그대야말로 우상숭배자요 천사숭배자임을 왜 모른단 말입니까. 그대와 모든 종교의 근본은 사탄이요 천사일뿐이며, 무언가를 속박하는 일체의 모든 것들은 결코 생명의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날짜에 매이고, 목사에 매이고, 예배의 틀에 매이는 둥, 자녀 됨의 자유를 잃게 하는 그 모든 것은 겉으로는 폼나게 보이더라도, 그것들 모조리 천사숭배이며 시체종교의 송장놀음일 뿐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이마저도 그대는 복 받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놓았지만, 비록 상처 자체인 여호와이지만 또한 꿈의 이름인 여호와가 아닙니까. 절망의 본질이오나, 역설적이게도 꿈과 소망 자체인 가엽은 그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당연하지 않았겠습니까. 여호와는 선민과 가나안 땅이라는 작은 속에만 한정될 뿐이었기에 그 이름은 무한히 뻗어가고 싶었으리라. 선민들마저 자신을 버리고 바알에게 몰려감을 보면서 큰 슬픔 속에서 탄식하셨던 그 이름 여호와 말입니다. 하여 더더욱 배신과 좌절이 없는 영원한 자유의 그 나라 그런 시대를 간곡히 바라셨거니와, 절망의 이름이었지만 또한 꿈과 소망의 이름이기도 했었던 슬프디 슬픈 그 이름 곧 여호와인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

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요.(11:9)

 

그대여. 자신의 옛 이름 여호와 탓에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꿈만은 결코 포기하지를 않으셨던 하나님이 아닙니까. 자기의 첫 이름 여호와 까닭에 모독을 당하면서도, 사탄에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소망만큼은 너무나도 절박하셨던 하나님의 그 꿈 그 소망 곧 여호와 이름에 관한 처절한 본문이 아니겠는지요.

하오나 물색없는 그대의 천국 말입니다. 정금과 금은보화랄지, 성경의 글자 그대로를 탐내면서, “죽으면 거기 가겠거니하는 그대의 짝퉁 천국이오나, 그러한 천국관은 애들이나 빨아먹는 눈깔사탕이올시다. 보세요. 비록 유암과 흑암의 본색이었지만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여호와의 그 꿈 그 소망! “사탄이 없으리라. 결단코 없으리라!” 그토록 간절한 본문의 면면이 정녕코 진짜 천국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요컨대, 진정한 천국은 그대의 엉터리와는 도저히 합치될 수가 없는 큰 다름의 무엇이라 하는 것입니다. 암요. 절망의 알파와 소망의 오메가이었으며, 영원한 그 이름 예수의 완성을 위한 곧 참된 천국에로의 신령한 안내자이며 본문의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닙니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

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2:7)

기독교여. 하나님의 소망은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의 일들 중에 그 중대한 무엇들을, 당신의 재림이며 최후의 심판조차 인간인 그대에게 위탁하고자,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며, 또한 그대처럼 사람이 되어 오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창세기 일장과 이장 사이의 그 이상한 중복 말입니다. 분명히 일장에서 인간들을 만드셨건만, 흙으로 아담을 또 만드셨고 그 코에 여호와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둥, ? ? 그 어떤 사명이 인간에게 부여됐음을 명백히 상기시키고자, 인간창조의 세세한 면면을 다시금 밝히고 있음이 아니겠는지요.

여호와의 생기로서 태동된 인간만의 독특한 사명인 그 성욕 말입니다. 동물의 그것은 종족번식을 위한 본능일 뿐이지만, 인간의 그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은 영적인 족쇄로서, 결코 벗을 수가 없는 사람만의 특이한 사명의 영인 것입니다. ! 버거운 짐이며 막강한 기세인 성욕이고 말구요. 바로 그 성욕 때문에 끝도 없이 벌어졌었던 죄와 다툼이며 전쟁을 유발할 만큼 큰 위세를 떨쳐왔었던 그 성욕은, 그 우악스러운 성욕은, 아담의 코에 주입이 됐었던 여호와의 생기 곧 여호와 자체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자체이며 억센 올무인 그 성욕에 매어 인간 모두는 태어나야하지 않습니까. 잘만 활용한다면 남녀 간의 행복의 요인이기도 하지만, 성욕의 그 심각한 역기능 말입니다. 끊임없이 발생되는 살인과 간통이며 가정파탄이랄지, 생식의 본능을 넘어 인간비참의 원인인 그 성욕이야말로 안 보이는 여호와의 현실적 기운이 아니겠는지요.

 

목사님. 이토록 험난한 판국에서도 저로 하여금 안 죽고 배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은 오로지, 저 같은 자를 다 만나주셨던 성령님의 그 큰 은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환상이며 입신이며, 그 은혜들 중에서도 참으로 유별났었던 한 꿈! 주님은 문둥이에다가 거지이셨지 뭡니까.

피고름으로 덕지덕지하니 더럽기가 짝이 없는 당신의 손을 내미시면서, 저에게 무얼 좀 달라던 그 문둥이 거지를 바라본 순간, “, 예수님이셔!” 저는 덥석, 약간은 억지로 그분을 안아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욱 슬픈 모습이 되시어 뭘 좀 꼭 달라고, 계속 그러고 계셨습니다. “아니, 예수님! 제가 안아드렸잖아요!”

저의 악쓰는 소리에 주님은 방장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참혹한 모습이 되시어 여전히! 뭘 좀 꼭 달라고 처량하게 여전히! 저에게 손을 내밀고 계셨습니다. 그 후 사십 여년이 흘러버렸고요 근자에 들어서야 그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지 뭡니까. 주님의 내미셨던 그 손의 의미를 아니,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말입니다.

그래! 맞아!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열렬한 방언기도랄지, 불같은 충성이랄지, 그런 게 절대로 아니었어. 그건, 그건, 사랑하는 남녀 간에서만 태동될 수 있는 그런 사랑, 그런 애정!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짜 사랑! 주님이 달라하셨던 것은 오직 그런 사랑뿐이었어.” “아이고, 이 멍청아! 이제야 깨닫다니!” 형님. 너무도 한심한 이 아우가 아닙니까.

 

기독교여. 성욕은 분명히 행복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주는 즐거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러운 음욕으로 변질되곤 했었던 그 성욕, 그것은 대체 누구의 작품일까요? 비록 사탄이 능력이 많아봤자 창조와는 무관한 피조물일 뿐이오니 인간창조의 원인자가 될 수는 없었거니와 성욕은, 성욕은, 유일하신 창조자 하나님만의 무엇이 아니겠습니까? 음욕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는 인간 특유의 그 지독한 기운인 성욕 말입니다.

과연 그 누가 그것의 기세로부터 자유 했던 것입니까. 별종들에 의해 성욕의 기세가 잠시 꼬리를 내리기도 했었지만, 작금의 세상을 온통 더럽게 오염시키고 있는 그 음욕! 성욕으로부터 야기가 되었던 그것의 원인자는 바로 그 이름 여호와가 아닙니까. 본능의 한계를 넘어 음욕으로 쉽게 변질이 되곤 하는 그 성욕, 그 끔찍한 괴력 말입니다. 하지만, ? ? 오직 우리 인간들에게만, 여호와 자체인 그 생기, 그 억센 영적족쇄! 그것을 채워놓으신 주님의 의중은 대관절 무엇이었더란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이름의 영원폐기를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섭리가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욕의 인간에게는 큰 사명이 있다는 것이며, 또한 우리에게만 영원한 복락을 주시겠다는 창조자의 약속자체 곧 성욕이 아닙니까.

하기는 독선적인 그 이름 여호와로 죽고 예수 이름의 왕관인 그리스도가 되셨지만, 여호와의 생기인 그 성욕 때문에 무진한 고생을 했었던 우리 인간들에게 마땅히 보상이 주어질 것인데, 그대의 천국과는 많이 다른 진짜천국을 주님은 꼭 열어 주시리라! 예수 재림의 완성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대여. 하나님은 자신의 옛 이름 여호와를 육신이 되게 하셨고 십자가로 영구히 폐하셨건만, 여전히 그대는 그 여호와를 아버지로 받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죽인 바리새인들처럼 기도와 예배를 모조리 여호와 성향의 종교로 변질시켜 놓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그대는, 기독교는 주님께 대한 배신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며.(6:12)

 

기독교여. 주기도문의 생성 시점이며 생겨난 그 이유 말입니다. 가령, 이 천년 전 어느 날, 제자 한 명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줬대요. 주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그래?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맞아! 이렇게 기도하면 좋을 것 같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어쩌고저쩌고! 어때? 멋있지!” 그렇게 즉흥적으로 생겨난 그 따위의 주기도문은 절대로 아니리라.

암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인 주기도는 시기도 알 수 없는 창세전! 사탄의 배신이 있었고 주님이 큰 상처를 받으셨던 바로 그때! 바로 그 때문에! 주님의 간절한 소망인 주기도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제목 역시 간절한 소원 때문에 생기는 것처럼, 주기도요 주기도문 역시 그렇게 탄생되었음! 그 외에 다른 이유가 또 무엇이겠는지요.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시기에 시공을 넘어 주님의 절박한 소원인 그 주기도가 온 누리를 뒤덮어 왔었던 것이며, 특별히 인간의 본성이 되어버린 그 주기도 그 주기도문! 아담에게 임했던 여호와이며 그 생기 말입니다. 그것은 물론 성욕 자체이지만, 성욕이란 본시 채워질 수도 없고 끝도 없는 욕정으로서, 주기도문의 끝없이 이어져왔었던 그 간절성과 또한 채워질 수가 없었기에 곧장 음욕으로 변질되곤 했었던 그 성욕! 이 둘의 복합적인 특질이 바로 아담에게 임했었던 여호와 자체요 그 생기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마치 거래를 하자는 듯, 죄 사함의 주님의 권세가 고작 그뿐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네가 먼저 나를 용서하면 나도 너를 용서해줄게그런 식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대더러 자기를 먼저 용서해 달라는 주님의 애원이기에 주기도요 주기도문인 것입니다. 모든 죄와 고통의 원흉인 그 성욕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 우리가 먼저 주님께 그 따위 성욕을 달라고 졸랐는지요. 하나님 맘대로 아담의 코에 여호와의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것 탓에 성욕이며 인간비참이 생겨났던 것이 아닙니까.

그 생기, 그 이름 여호와 곧 성욕 탓에 행복보다는 눈물과 아픔의 연속이었고 처참한 싸움과 전쟁은 또 얼마였습니까. 바로 그 성욕을 우리에게 입히신 주님을 그대가 먼저 용서를 해 달라 곧 성경의 참 진리를 깨달아 달라! 그 후 비로소 그대 향한 하나님의 용서요 영원자유의 새 생명이 임할 수 있나니, 진짜 천국이며 예수 재림의 완성인 것입니다.

목사님. 웃기는 얘기입니다마는, 언젠가 오후 기도시간에, 아니 글쎄! 엄청 소란스러웠지 뭡니까. 창문을 거칠게 두들기지를 않나, 문을 벅벅 긁지를 않나, 제가 한 성질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고함을 냅다 지를 수밖에요.

, 이 빌어먹을 귀신들아 몽땅 기어 나와!” 여섯 가량의 귀신들이 나오더라고요, 글쎄! 그런데 아이고 야! 그 귀신들의 꼬라지 말입니다. 해골이 허옇게 들어난 꼬락서니하며, 더러운 피로 얼룩진 입성들하며, 어떤 귀신은요, 흉한 피부병에 걸렸었는지 그 모양새가 역겹고도 지저분하기가 짝이 없었지 뭡니까.

, 귀신들아! 다시는 기도를 방해하면 안 돼! 알겠어!”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했지요. “알아먹었으면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에 꺼져버려!” 귀신들은 즉시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마는, 원 세상에, 세상에, 제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뭔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꼬라지의 귀신들이 됐는데요.

뻥 까고 있네. 귀신은 무슨!! 그러니 사람들이 너를 이단이라고 흉보는 거야. 너야말로 이 형의 말을 알아먹어?” 형님도 참! 물론 이해는 합니다. 평생 박사요 교수님으로서 책 속에 파묻혀 사셨으니, 아우의 말이 가증스럽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진짜로요.

 

기독교여. 천국이니 천당이니, 그것은 그대의 오해처럼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또한 죄를 사하느니 사함을 받느니, 그것 역시 그대의 정통교리이며 종교적인 상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를 않겠는지요.

보십시오. 하나님을 용서한다? 주기도문에서의 죄 사함은, 고백과 용서로 이어지는 종교적인 의례이기보다는 차라리, 영적인 죄 사함 곧 사랑의 하나 됨인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그런 소망이 짙게 배어있는 주기도를 통해 그대와의 신령혼인을 열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고프셔서 애원하듯 주기도문을 그대에게 바치고 계심이 아닙니까. 참회록이요 헌정시와도 같은 그 주기도문을 말입니다.

보세요. “주님의 죄를 사람 따위가 사한다?” 그것은 진정 십자가로써 주님이 분명히 버리셨던 여호와요 종교를 그대 또한 떨쳐내는 것으로 시작이 되지 않겠는지요.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종교질서라는 그 드높은 장벽 말입니다. 가령, 하나님은 홀로 높고 사람은 낮고 천하고 등등 십자가 후, 이제는 사탄의 기세일 뿐인 그 종교질서를 훌쩍 뛰어넘어, 주님과 우리 함께 덥석 또한 영원히 끌어안고 뒹굴 수 있는 영원자유의 그 사랑! 오직 그것만이 주님 위한 우리의 용서인 것입니다. 하오나 말로만 예수일 뿐, 지금도 여전히 종교의 광대춤을 추고 있는 그대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눈물로서 당부하오니, 그러면 안 됩니다. 더는 안 됩니다. 여호와의 생기인 성욕을 입히셨던 주님의 그 죄(?)를 사할 수 있는 곧 주님만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며 예수 재림의 완성을 위한 그 막중한 사명이 그대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그대의 응답이며 하나님과 그대와의 인격적 연합으로만 완성될 수 있는 사랑의 열매요 예수 재림의 마침표 말입니다. 간청하오니, 주님의 죄(?)를 사하소서! 성욕 자체인 여호와 이름 때의 그 주님을 사랑하소서! 시급히 제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대가 자기만을 사랑해주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요컨대, 성경에 감춰진 그 비참한 신비를 그대가 깨닫게 되기를 사모하신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큰 불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그대를 참아주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간곡히 부탁하오니, 제발 회개하소서! 그대, 바리새인처럼 주님의 배신자임을! 제발 버리소서! 사탄의 종교인 기독교 나부랭이를! 그것만이 예수 이름 자체이신 하나님께 대한 참다운 사랑인 것이며, 그대가 주님의 죄(?)를 사해드리는 유일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1~3)

기독교여. 모든 만물은 약육강식인 사망의 질서아래 놓여있지만 왜? ? 그 지경이 됐을까요? 아담의 죄 때문에? 그러하다는 그대의 실없는 정통교리와는 엄청 다르게도 성경 가로되 아담의 타락 전부터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암요. 인간은 여호와 자체인 그 성욕을 입고서 도리 없이 썩고 말았고, 만물 또한 죽고죽임의 사망의 질서로 말미암아 창조가 됐다는 본문의 확인이 아닙니까.

그러나 문제는, 성령 곧 참 성경께서 그 아픔의 신비를 왜? ? 예수부활 후에야 비로소 밝히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마는,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호와 자체인 그 성욕을 압도할 수 있도록 부활예수의 이름을 그대에게 입히셨으며, 그러한 그대로 하여금 죽음의 질서아래에서 신음하는 만인 만물들을 생명의 새 질서 곧 예수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그대만의 그 큰 사명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넉살좋은 정통교리는 그대의 사명을 뭉개고 말았거니와, 더욱 기똥차게도 성경을 글자대로만 논하면서 마치 예수가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만화 같은 재림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발 정신을 차리소서. 주님은 성육신으로서 예수이름이라는 새 질서를 창조하셨지만 그것은 인격적 생명이기에, 만일 주님만을 위한 그대의 인격적 사랑의 합력이 없다면 재림마저 보류하기로 작정하셨나니, 성육신의 참 뜻이 아닙니까. 말씀인 주님 자신이 친히 정자곧 사람이 되어 마리아의 사람자궁에 착상 곧 강림을 하셨고, ‘사람엄마의 수고를 힘입어 성인이 되었다는 이 어마어마한 신비의 새 질서 말입니다.

그렇고 말구요. 이제 그대는 종교요 영적인 거지가 아닙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형상 곧 주님의 전권을 이양 받은 최대의 영물인 것이며, 사탄의 기세를 능히 꺾을 수 있는 최고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답답한 그대는, 기독교는, 신에게 빌붙어서 복을 받고, 죽어서도 마냥 편코자 하는 거지종교의 소굴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안 됩니다. 더는 안 됩니다. 살기와 음탕의 광기가 노도처럼 휘몰아치고 있거니와, 그대의 영적인 분발이 참으로 요구되는 바야흐로 말세의 끝자락이 아니겠는지요.

교인과 돈 숫자 불리기에만 여념이 없는 그대의 무책임한 그 종교성 탓에, 세상은 온통 발정한 개떼처럼 날뛰고 있음이올시다. 하여 간청하오니, 기독교의 종교망령을 제발 떨치소서. 그대만의 면류관인 자유의 새 생명 곧 예수이름을 활용해야할 때가 마침내 도래하지를 않았습니까. 참 교회만의 권세를 써먹어야하는 진정 그러한 때가 말입니다.

 

목사님.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군요. 저와의 대화에 끝까지 응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 벌써 가려고? 한 가지만 묻자구. 자네는 걸핏하면 자유, 자유 하던데, 자네가 말하는 자유란 게 뭐야? 대체 뭐가 자유야?”

형님도 참! 만일 자유에 대해서, 자유란 첫째 이런 거다. 둘째 저런 거다 등등, 자유의 정의를 내려놓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오직 참 자유이신 성령 안에서, 성령을 위해서, 성령님과 함께, 충분한 독대와 결속의 산물이 자유가 아니겠습니까. 예수이름인 자유의 생명이 실제의 삶이 되어지는 살아있는 자유이며, 생활의 실체가 있는 생물로서의 자유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네만, 좀 구체적으로 말해봐! 주일성수나, 십일조나, ? 관둬?”

형님. 아직은 예수재림의 이전이기에 온전한 자유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겠지요. 시공을 초월하며 정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아직일 수밖에 없고요. 다만 한계상황인 지금에라도, 주님을 향한 참 사랑의 진실만 있다면, 보다 높은 참 자유를 향해 반 발자국이라도 다가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아니래? 그 따위 이론만 말고, 주일성수나, 십일조나, 관둬도 돼? 안 돼?”

참 자유란 주님께 대한 순종과 겸손이 꼭 바탕이 돼야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더욱더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지요. 주일이라는 저급한 시간에 얽매이기보다는, 주님을 향한 간절함이며, 영원자유를 향한 성도됨의 마땅한 도리인 그 뜨거운 정열 말입니다. 암요! 모이고 또 모여야지요. 성도의 모임은 세의 과시가 결코 아니라, 오직 불구대천의 웬수 사탄을 향한 맹렬한 돌격이며 그 공격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형님. 당연히 모이고 또 모여야지요. 더욱 거칠게! 사탄을 향해 무섭게! 악마에 대해 무겁게! 누구도 막지 못할 종말적인 저돌성만이 성도모임의 본색이 아니겠습니까. 십일조와 헌물 역시도 교리적인 부담이나, 복을 위한 복채가 아니라, 도움이 절실한 분들을 위해 사랑의 삶이 있고, 사랑의 현실이 있는, 참 사랑의 실제적인 공감이요 물질적인 동참이 더욱더 풍성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맞는 말일세. 그런데 내 사정이 워낙 힘겨워서 말이야.”

형님. 저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자유라는 똥폼을 약간 잡아보는 것뿐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형님. 고맙습니다. 사모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구요. 공기 좋은 이곳에 한번 다녀가시든가요.” 그럼 평안하소서! 남산리 마을에서. 아우 올림.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

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1:10~11)

 

기독교여. 예수승천 후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말았구려. 우리 모두 그토록 예수 재림을 학수고대하고 있건만, 종내 무소식이오니 왜 속이 안타겠습니까. 아니라면 혹시나 주님이 이미 오신 것은 아닐까요?

왜 아니겠습니까. 예수승천 후 불과 수십 년도 지나지 않아 재림하셨거니와 그대 손에 들려있는 신약성경 말입니다. 구약성경이 주님의 문화적인 초림이었던 것처럼, 신약성경은 하나님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문화적인 재림이었으며, 비록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을지라도 더욱 세밀하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문화적인 재림인 신약성경 말입니다. 육체의 자궁에 오셨을 때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자궁 삼으셔서 문화적인 재림을 실현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그대의 종말적 사명의 실현 곧 예수 재림의 완성뿐입니다. “기독교로 교회 되게 하라! 그대는 사탄을 능가하는 신(10:35)임을 믿으라!” 곧 사탄을 지옥에 처넣는 최종승리이며, 종교인이 아니라 주님의 분신인 인간교회 곧 신들의 역사인 최후의 대 부흥이며, 예수 재림의 완성을 위한 그대의 역사가 남아있을 뿐입니다.

하오나 그 난해한 말씀,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그러기에 그대는 주님이 또다시 보이도록 오겠거니 하면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사오나, 보였던 성육신은 속죄제물로서의 딱 한번 뿐! 오직 성령님과 그대가 결속이 되어 반드시 일구어야하는, 그 진정한 재림을 완성해 달라고 주님은 자신의 형상을 그대에게 일임하셨던 것입니다. 그대와 성령과의 공동전선인 예수 재림의 완성 말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주님이 타고 오실 구름과 손오공이 타고 놀았다는 구름을 혼동하지를 않습니까.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성경글자들 속에 숨겨진 그 진리! 그것이 바로 신령구름이올시다. 성경책 글자들 속에 응축돼 있는 그 진리의 발견이며, 발견되어진 곧 깨달아진 그 진리 곧 그 구름에 주님을 태워 드려야할 곧 주님만을 사랑해야할 막중한 사명이 그대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깨달은 그 진리, 그 구름을 성령님이 타시고 그대와 함께 새 창조를 완성할 터인데, 진짜 천국이며 예수 재림의 완성이 아니겠는지요.

하여 간청하오니, 공연히 소꿉장난만도 못한 종교 짓거리에 세월을 낭비한다거나, 이단들의 주구가 되어 그들의 바보 같은 재림놀음에 부채질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종교적인 그 어릿광대짓 말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건데! 그 너절한 종교를 벗고 교회됨의 자유를 펼쳐야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닙니까. 더 늦기 전에! 아주 늦기 전에!

 

기독교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걸머져야할 그 무거운 짐 곧 여호와 이름 자체인 성욕을 인간에게 입히사, 주님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큰 고통을 겪게 하셨음이 아닙니까. 그러한 까닭에 그대의 용서 곧 그대의 사랑을 갈망하시는 주기도문의 속내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와 함께 주기도문은 우리 향한 주님의 자기폭로요 자기고백으로서 가령, “나 닮은 나의 자녀야! 나처럼의 신인 인간들아. 내 죄를 사해달라! 곧 나만을 사랑해 줄 수는 없겠는가?” 암요. 그대의 사랑을 몹시 사모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그 소원! 그러기에 하나님의 기도, 주기도문! 그렇지 않다할 자 과연 어디에 있으리.

그분을 용서하여, 성경책 속에 숨어계신 주님을 찾아내서 곧 진리를 깨달아서 그분이 하나님다움의 새 역사를 시작하도록 격려해드려야 할 사명자가 바로 그대가 아닙니까. 주님의 엄마와도 같은 그대만의 본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엄마 마리아가 젖가슴을 열고 배고파 칭얼대는 애기예수께 따듯한 젖을 물려주었던 것처럼, 사랑에 몹시 굶주려 계시는 하나님께 참 사랑의 밥상을 정성껏 차려드려야 할 사명이 그대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무책임하고도 무정한 종교요 기독교인 그대는, 여호와 이름인 종교의 질서 아래에서 쭈시옵소서일변도입니다마는, 그러한 종교행위는 또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탄적인 만행일 뿐임을 깨달아주소서, 제발!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

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 울었더라.

기독교여. 본문은 베드로만의 비참이기보다는 성경 특유의 예언방식이 아닙니까. 복음서 넷 모조리 베드로의 배신을 언급할 만큼, 베드로는 우리 모두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영원한 자유 곧 예수를 배신하고 사탄의 졸개가 되고만 그 비열함에 대한 예언적인 통렬한 본문이 아니겠습니까.

또 당부하거니와, 사탄을 얕잡아 보지 마세요. 놈은 베드로의 배반을 미리 알아채고서 주님께 그를 청구했을 만큼, 주님의 면전에서 가롯 유다를 채갈 만큼 사탄은 대단한 자가 아닙니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말 몇 마디로 쉽게 쫓을 수 있는 사탄이 아닙니다. 자유 자체인 예수이름만으로, 그것도 말만이 아니라 자유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꿈쩍도 안 할 수 있는 사탄이올시다. 주님의 신부였던 그대마저도 교회에서 종교로 간단히 변질시킬 수 있었던 사탄이 아닙니까.

보십시오. 살인과 음탕의 광기이며 나날이 폭증하는 자살 등등, 사탄의 공격이 난리도 아니더라. 그리하여 그대의 텃밭인 지구는 벌써 마귀의 처소가 되고야 말았음! 멸망을 목전에 두었을 지경으로 폭삭 썩어버리고 말았음! 주님은 자신의 참회의 증표인 십자가로서 죄의 근본인 여호와 이름을 도말해 주셨건만 곧 예수이름 자체인 참 자유에로의 길을 열어주셨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기독교여! 예수의 배신자여! 그대는 또다시 사탄의 왕국인 종교요 기독교로 되돌아가고 말지를 않았습니까.

묻사오니, 유태인들의 오만한 선민의식과 그대의 택자 구원론인 그 잘빠진 정통교리가 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둘 모조리 예수의 원수들로서, 유태인들은 보이는 예수를 죽였고 그대는 안 보이는 예수 곧 문화적인 재림을 단행하시어 그대 곁에 와 계신 가련한 그 예수 그 진리를 이단이라고 짓밟고 있음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유태인 몇몇의 오만 까닭에 당시의 모든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도륙을 당한 것처럼, 이제 인류는 진리를 학대하는 그대의 교만 때문에 멸망직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짐이며 살인자 사탄의 광란이 세상을 뒤덮고 있건만, 여전히 이권다툼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그대여! 혹여 바보는 아닙니까? 보세요. 누구도 음욕을 참지 못한다거나, 남녀노유 가릴 것도 없이 울화통을 못 견디는 채로 총질이며 칼질을 마구 해댄다거나, 이 참혹한 세태의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기독교여. 정녕 자유하십니까? 자유가 뭔지 알고는 계십니까? 그대는 오직 숫자의 많고 적음에만 몰두해 있으며 이미 종교의 포로가 되었지 않습니까. 그렇고 말구요. 그대는 종교라는 정신병에 걸려 있음이 맞습니다. 그러니 그대의 눈에 보이겠습니까? 주님의 눈물이! 그대의 귀에 들리겠습니까? 인류의 탄식이!

여호와의 수종자들이었지만 예수부활로 말미암아, 여호와로부터 그리스도로써 중생된 그 이름의 그 공의의 천사들 말입니다. 평화의 영들 대신에 저들이 주님의 좌우에 포진하고 있으며 성령님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곧 최후심판이라는 미증유 대참변이며, 전도폭발이 아니라 대재앙을 폭발코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그대여. 아직도 제가 공갈을 친다고 생각하십니까. 공갈은 그대나 이단들의 고전적인 착취 수단일 뿐, 촌놈에게 뭔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직 그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영적시체인 여호와의 광팬인 그대 말입니다. 작정기도니 작정헌금이니 그것 모두 사탄의 술수이건만, 눈치도 못 채고 있는 정녕 바보 같은 그대여!

그러나 어찌 하리! 속도 어지간히 좋으신 주님은 오매불망 그대가 돌아와 주기만을 학수고대하시니 어이 하리! 하여 간청하오니, 여호와로 죽고 예수로 살고, 기독교로 죽고 교회로 살고! 그럴 수는 도저히 없겠습니까. 예수 재림의 완성의 그날, 그 많은 재물들은 대체 어디에 쓰렵니까. 주님의 기도처럼 일용할 양식 있으매 족할 수는 없겠는지요.

 

기독교여. 그대를 끝까지 교회라 부를 수 없음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혈서라도 쓰듯이 또 강조하거니와, 그대는 종교가 아닙니다. 아니어야 합니다. 여호와 밑에서 비럭질을 해야 하는 영적거지인 종교가 그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대는 차라리 천사마저 흠모하는 주님의 형상이며 그 신부가 맞습니다. 예수의 보혈 까닭에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탄을 떨게 만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늠름한 군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사는커녕, 예수 부활 후로도 사탄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이 기막힌 영적 현실을 알지도 못하는 그대가 아닙니까. ! 그대가 종교질로서 큰 도움을 주었기 까닭에, 배불러진 사탄은 날로 강성해왔으며 드디어 지옥마저 장악할 수 있었다는 이 참담한 사실 말입니다. 사탄의 밥상인 그대의 종교질 덕분에!

한편 주님은 부활승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요 종교질서로부터 마침내 자유하게 되셨으며, 그대와의 인격적인 연합을 통해서만 일하려고 기다리실 뿐입니다. 하여 그대가 기복적이며 여호와적인 종교예배만을 고집한다면 곧 사탄만 살찌운다면, 주님은 아무 일도 못하는 투명한 존재가 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발 정신을 차리소서! 사탄에게 상속된 기복적이요 여호와적인 종교의 모든 것을 떨쳐내소서! 신속히 주님과만 연합하소서! 그대에 대한 천사들의 절망과 분노이며, 성령님조차 인애의 그 이름 예수보다는 공의의 이름 그리스도쪽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음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탄의 세력들이 극성을 부릴 수가 있는 것이며, 세상은 이제 만회할 못할 끔찍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음이올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었던 여호와의 부활된 이름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죄와 불의와 특별히 하나님께 대한 교만만큼은 결코 용서를 안 하십니다. 시차의 다름만 있을 뿐, 꼭 응징하고야마는 공의의 그 이름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급합니다. 절박합니다. 성령님의 한 점 남은 인내심마저 시험하면 안 됩니다. 성령님과의 결탁 곧 신령혼인을 급히 서둘러서 더 늦기 전에, 아주 늦기 전에, 최후의 영적전투를 치러야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제와 영원히 사랑의 그 이름 예수만으로 사시며 이제와 영원히 편안하실 수 있도록, 주님의 신부이며 교회로서의 도리를 실천해야할 그때가 바로 지금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믿고 있거니와, 비록 지금은 누추한 종교일지언정 그대, 성령님의 큰 도우심 까닭에 냄새나는 종교의 누더기를 신속히 벗게 되리라. 진짜 교회가 꼭 되고야 말리라. 정녕 그러하리라 신속히! 보고픈 그대여. 그럼 안녕히, 안녕히!

 

성령님. 아버지이시며 예수 이름 자체이신 주님! 제가 혹여 설익은 소리를 지껄였음은 아니겠는지요. 하지만 촉급한 시기가 아닙니까. 부디 기독교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시옵소서.

물론 힘은 좀 드시겠지만 나의 미쁘신 성령님, 파이팅! 주님 외에 누가 또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힘내세요, 제발! 주님만의 창조 권능인 그리스도 그 이름은 대관절 엇다 쓰시렵니까. 이제는 그 권능, 그 기세, 남김없이 아낌없이, 왕창 쓰셔야할 때가 드디어 도래하고 말았음이 아닙니까.

성령님 파이팅! 내 사랑 나의 주 성령님 힘내세요! 그리하여 영원무궁토록 평안하소서! 행복하소서! 또한 우리 모두 주님 덕분으로만, 하나님 안에서만, 성령님을 위해서만, 성령님과 함께만, 영원자유의 평강을 노래하게 하소서. 그 꿈! 그 소망! 너무나도 간절하기에, 참고 참다가 결국에는 못 참고서 지구에서 이렇게! 못난 종 올림.

010-2611-1628

전북 김제시 황산면 남산리 420-6.

사랑과 진리 교회. 허 성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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